코이노니아 시리즈 (5) - 거룩 위에 세워지는 코이노니아 (요일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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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26회 작성일 26-01-31 22:06본문
코이노니아 시리즈 (5) - 거룩 위에 세워지는 코이노니아 (요일 1:3-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는 코이노니아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광야를 이기는 힘은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그리고 말씀과 지체와의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광야의 시련을 이기는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코이노니아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코이노니아는 온전한 연합안에서 참여하고 교제하고, 나누고 동역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몸인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워져야 하는가요? 그것은 바로 거룩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군중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거룩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오늘 우리의 비전이 주님의 온전한 몸으로서 코이노니아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하는 것이 거룩인 이유가 무엇이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1. 거룩한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즉 코이노니아의 시작은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성도와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 즉 코이노니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즉 코이노니아 안에 거하기 위해서 빛 가운데 거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으로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 1:5,7).
사도 요한은 코이노니아를 말하면서 거룩, 즉 빛과 어두움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빛 가운데 거할 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거룩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특권은 아무에게 열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받아 거룩한 존재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며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거룩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거룩의 의미는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구별됨’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그 분께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가 없다는 것을 넘어서,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전능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것은 모두가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9).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하신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날은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된 날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거룩은 하나님과 관계된 개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거룩한 삶 가운데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행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거룩한 삶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헌신이기에 거룩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모일 때에 임재하셔서 그 모임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거룩한 곳에 나타나셔서 모임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에 더욱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말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과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거룩이 무너질 때, 코이노니아도 함께 무너집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그 당시는 온전한 코인노니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코이노니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와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길로 들어선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아담과 하와도 그 날 이후로 부부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벨과 가인의 코이노니아도 가인의 죄로 인하여 깨어졌습니다. 가인의 죄는 악한 자에게 속한 열매였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 3:12).
죄는 하나님과 사람 아이를 무너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무너지게 합니다. 코이노니아의 원수는 바로 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구원하셨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한 것입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이 무너지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도 동시에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의 진멸은 피했지만, 레위 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중 삼천명이 칼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가 무너지자, 백성들 사이의 관계도 깨어지며 큰 혼돈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그 결과로 사람과의 관계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 관계가 가족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 찾아오는 열매는 큰 고통이 됩니다.
거룩이 건물의 기초라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삶의 기초인 거룩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안에 거하는 거룩이 우리의 삶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는 거룩이 무너질 때 가정이 붕괴되고 나라가 무너지는 수 많은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거룩한 교회였지만 거룩이 무너지면서 코이노니아가 깨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거룩이 결핍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성도를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에 참가하도록 초청장을 보내었지만, 그들은 거룩하지 못함으로 세상의 가치를 교회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코이노니아를 세워가야 했지만 그들은 바울파, 아볼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의 뿌리에는 육신의 교만이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고린도 교회가 코이노니아를 이루지 못하게 한 이유는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부 성도의 성적인 이탈에 대하여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이 죄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후에는 그 죄가 온 교회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분열이 됩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코이노니아를 방해하는 요소는 죄가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 중심에는 사람의 시기와 질투,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범했던 죄는 불평과 원망이 다수였습니다. 환경과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원망은 이스라엘의 코이노니아를 무너지게 했고, 고라 자손의 반역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은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이 무너지면서 결국 코이노니아가 무너지고 광야에서 자신을 묻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라고 권면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가 떠나가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거룩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코이노니아는 빛 되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우리는 서로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있다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자는 성도와의 코이노니아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성도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의 부정한 행실이 예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거룩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코이노니아의 삶은 우리가 항상 빛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깨끗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세상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와 같이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며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성도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교만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삶은 겉으로는 평안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코이노니아의 삶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주 앞에 고백함으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와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속죄제는 자신의 죄와 성소를 정결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부지주에 범한 죄가 생각나면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피를 분향단이나 번제단에 뿌려서 죄로 인하여 부정해진 성소를 정결케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죄도 사함을 받지만, 동시에 성소도 정결해 졌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부정해지는 것을 피로써 정결케 한 것은, 오늘날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도 세상의 죄로 인하여 부정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와 회개를 통하여 공동체가 더욱 정결해 져서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더욱 투명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의 회복은 사랑의 회복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코이노니아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무너지는 것은 코이노니아를 무너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을 회복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을 고백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안에 원망과 불평이 코이노니아를 방해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우리의 숨겨진 죄가 하나님과 성도의 코이노니아에서 멀어지게 하는가요? 혹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마음에 가득함으로 코이노니아에서 멀어지고 있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두움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에 들어가고 성도의 거룩한 코이노니아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결론을 드립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거룩 위에만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빛 가운데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느냐?” “너는 나와의 사귐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느냐?”
이 시간, 변명하지 맙시다. 숨기지 맙시다. 빛 되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나아갑시다. 죄를 자백하면,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회복되고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는 코이노니아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광야를 이기는 힘은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그리고 말씀과 지체와의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광야의 시련을 이기는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코이노니아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코이노니아는 온전한 연합안에서 참여하고 교제하고, 나누고 동역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몸인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워져야 하는가요? 그것은 바로 거룩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군중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거룩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오늘 우리의 비전이 주님의 온전한 몸으로서 코이노니아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하는 것이 거룩인 이유가 무엇이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1. 거룩한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즉 코이노니아의 시작은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성도와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 즉 코이노니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즉 코이노니아 안에 거하기 위해서 빛 가운데 거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으로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 1:5,7).
사도 요한은 코이노니아를 말하면서 거룩, 즉 빛과 어두움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빛 가운데 거할 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거룩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특권은 아무에게 열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받아 거룩한 존재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며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거룩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거룩의 의미는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구별됨’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그 분께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가 없다는 것을 넘어서,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전능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것은 모두가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9).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하신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날은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된 날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거룩은 하나님과 관계된 개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거룩한 삶 가운데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행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거룩한 삶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헌신이기에 거룩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모일 때에 임재하셔서 그 모임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거룩한 곳에 나타나셔서 모임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에 더욱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말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과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거룩이 무너질 때, 코이노니아도 함께 무너집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그 당시는 온전한 코인노니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코이노니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와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길로 들어선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아담과 하와도 그 날 이후로 부부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벨과 가인의 코이노니아도 가인의 죄로 인하여 깨어졌습니다. 가인의 죄는 악한 자에게 속한 열매였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 3:12).
죄는 하나님과 사람 아이를 무너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무너지게 합니다. 코이노니아의 원수는 바로 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구원하셨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한 것입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이 무너지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도 동시에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의 진멸은 피했지만, 레위 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중 삼천명이 칼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가 무너지자, 백성들 사이의 관계도 깨어지며 큰 혼돈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그 결과로 사람과의 관계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 관계가 가족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 찾아오는 열매는 큰 고통이 됩니다.
거룩이 건물의 기초라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삶의 기초인 거룩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안에 거하는 거룩이 우리의 삶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는 거룩이 무너질 때 가정이 붕괴되고 나라가 무너지는 수 많은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거룩한 교회였지만 거룩이 무너지면서 코이노니아가 깨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거룩이 결핍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성도를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에 참가하도록 초청장을 보내었지만, 그들은 거룩하지 못함으로 세상의 가치를 교회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코이노니아를 세워가야 했지만 그들은 바울파, 아볼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의 뿌리에는 육신의 교만이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고린도 교회가 코이노니아를 이루지 못하게 한 이유는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부 성도의 성적인 이탈에 대하여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이 죄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후에는 그 죄가 온 교회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분열이 됩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코이노니아를 방해하는 요소는 죄가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 중심에는 사람의 시기와 질투,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범했던 죄는 불평과 원망이 다수였습니다. 환경과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원망은 이스라엘의 코이노니아를 무너지게 했고, 고라 자손의 반역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은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이 무너지면서 결국 코이노니아가 무너지고 광야에서 자신을 묻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라고 권면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가 떠나가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거룩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코이노니아는 빛 되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우리는 서로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있다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자는 성도와의 코이노니아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성도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의 부정한 행실이 예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거룩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코이노니아의 삶은 우리가 항상 빛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깨끗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세상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와 같이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며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성도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교만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삶은 겉으로는 평안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코이노니아의 삶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주 앞에 고백함으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와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속죄제는 자신의 죄와 성소를 정결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부지주에 범한 죄가 생각나면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피를 분향단이나 번제단에 뿌려서 죄로 인하여 부정해진 성소를 정결케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죄도 사함을 받지만, 동시에 성소도 정결해 졌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부정해지는 것을 피로써 정결케 한 것은, 오늘날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도 세상의 죄로 인하여 부정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와 회개를 통하여 공동체가 더욱 정결해 져서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더욱 투명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의 회복은 사랑의 회복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코이노니아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무너지는 것은 코이노니아를 무너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을 회복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을 고백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안에 원망과 불평이 코이노니아를 방해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우리의 숨겨진 죄가 하나님과 성도의 코이노니아에서 멀어지게 하는가요? 혹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마음에 가득함으로 코이노니아에서 멀어지고 있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두움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에 들어가고 성도의 거룩한 코이노니아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결론을 드립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거룩 위에만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빛 가운데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느냐?” “너는 나와의 사귐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느냐?”
이 시간, 변명하지 맙시다. 숨기지 맙시다. 빛 되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나아갑시다. 죄를 자백하면,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회복되고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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