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12) - 복음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하는 자유 (고전 9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05회 작성일 25-11-29 21:15본문
고린도전서 강해(12) - 복음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하는 자유 (고전 9장)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고린도 도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아폴로 등의 신전이 많았고, 그 신전에 바쳤다가 남은 고기는 신전의 잔치에서 사용했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서 먹음으로 식탁에까지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나는 우상 숭배가 생각이 나고 양심에 걸려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주장하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화평하는 것이고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내려놓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에는 후원자 피후원자 문화가 있었습니다. 부자 후원자가 철학자 연설가를 돈으로 후원했고, 그들은 후원자를 칭찬하며 그 집에서 먹고 사는 사회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다른 연설가들처럼 돈을 받으며 사역하면, 사람들은 ‘저 사람도 결국 돈 벌려고 저러는 거지’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자비량을 택했습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생활을 하면서 사역을 했고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도였으면 교회가 사례비를 주어서 사역하게 했을 것인데 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주에는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달리 손으로 일을 하니까 사도로서의 급이 떨어지잖아? 그리고 말도 철학자들만큼 화려하지도 않잖아? 라고 하며 사도 바울의 권위와 사도권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진짜 사도가 맞아?”
이러한 사회적인 문화와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왜 사도의 권리를 내려놓고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도에게 사역의 보상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것을 설명하기 전에 사도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 사역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사역의 권리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바울은 먼저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밝힙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저 사람이 진짜 사도 맞아? 그는 손으로 일을 하니까 좀 급이 떨어지는 것 아냐” 라고 하며 사도 바울의 사도 됨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으로 얻은 열매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 9:1). 사도 바울이 예수 우리 주를 보았다고 한 이유는 사도의 자격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본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역으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 것이 사도적 사역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짜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전 9:2).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사도 됨을 의심한다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사도 됨으로 인하여 주 안에서 인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사도라는 증거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너희 자신을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했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복음 사역에서 열매로 증명된 하나님의 일군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을 할 때에 자신의 직함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나타나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말씀으로 양을 먹이고, 눈물로 기도하고, 성도들의 영혼이 자라고 변화가 일어나는 사역의 열매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이서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한 것이 이것이니.”(고전 9:3)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사도라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리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답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사도의 권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야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3-6).
사도 바울은 먹과 마시는 권리에 대하서 말합니다. 이는 밥 먹을 자유가 아니라,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인 것입니다. 즉 사례비와 목회 활동비 등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동행하며 사역을 했습니다. 이는 부부가 동행 여행이 아니라, 사역자의 가정 전체가 보호와 돌봄을 받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는 생업을 내려놓고 사역에 전념할 권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비량을 택했지만, 원래는 사역자는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회가 뒷받침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회가 마음 편하게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 보장은 교회의 호의가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역자의 가정이 경제적 압박과 불안 속에 있으면 사역이 흔들리고 사역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예를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7-9).
사도 바울은 군인과 농부 목자를 비유를 설명합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싸울 때에 나라가 생활비를 책임지는게 당연하고, 농부가 자기 포도원에서 추수한 후에 열매를 맛볼 권리가 있으며, 목자가 양에게서 나오는 젖과 털로 유익을 얻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도 사역의 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생활하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명기 말씀의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는 소도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그 곡식을 먹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리고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9-11). 사도 바울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영적인 말씀을 전하는 자는 교회로부터 육신의 것을 얻는 것이 당연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레위인과 제사장은 땅의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업이 되셔서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 때에 드린 곡물과 제육, 그리고 가죽등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인의 몫으로 돌리셨고, 레위인들이 드린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성전과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활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시며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가르친 사도의 권리를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두 가지의 극단적인 관점을 피해야 합니다. 먼저는 ‘목사님은 무조건 다 옳다. 재정은 묻지도 말자.’라는 것은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재정은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고 성도님들도 재정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과도한 의심입니다. 사역자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세속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사례비나 복지에 대하여 방어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에 대하여 재정은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의 정당한 권리는 인정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자는 최소한의 생활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관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종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책임지고, 어떻게 함께 짐을 져야 하는 가? 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역자를 무조건으로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 내려 놓았습니다.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지원받고,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가정과 함께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세상 일을 내려놓고 복음 사역에만 전념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가 사례비를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스스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진실되게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 누구든지 내 사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 9:15).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말한 것은 자신에게 대우를 잘 해 달라는 의미도 아니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자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제 생활비 예기 꺼내려는 거구나, 앞으로라도 우리보고 더 대접해 달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앞으로 나에게 그렇게 대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 권리를 누리게 해 달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이 이러한 교리를 말하는 것은 요구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이라고 하며 마음에 있는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사역의 동기가 돈과 연결하거나 동기를 의심받는 일을 겪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자랑이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으로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돈으로 연결해서 비난하는 것으로 복음 사역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가치와 권위가 폄하되지 않게 하도록 계속해서 자비량으로 사역하겠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하는 사역이 결코 자랑이 아니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도리어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임으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7-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원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을 얻지만, 억지로 사명을 감당하더라도 직분자로서 감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듯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기에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궁극적인 상은 복음을 값 없이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 우리의 상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상은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 권리를 내려 놓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높임을 받고 많은 보상을 받음으로 격려를 받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느냐로 자신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겼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방식을 존중했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어 언어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 약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복음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종이 되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을 위한 사역자는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고린도 에서는 해마다 이스미아 경기장에서 열리는 큰 경기가 열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운동장에서 여러명이 달리기를 하지만 상 받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뛰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의 경주자가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하여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운동 선수는 시합을 앞두고 훈련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합니다. 먹는 것도 절제하고 자는 것도 절제하고, 취미 생활도 절제합니다. 왜냐하면 절제하지 않으면 운동 시합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얻는 것은 썩을 면류관인 것입니다. 당시에 우승한 자는 월계관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 상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들고, 썩어 버리는 관입니다. 사람들의 박수와 자신의 명성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여가야 합니다. 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향방 없는 것은 목표가 없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과 게으름, 편안함을 추구하는 본성까지 모두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분이나 환경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되심을 인정하며 복음을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할까 염려하며 거룩한 두려움으로 믿음의 경주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마주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나는 나의 권리와 자존심이 복음의 유익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두 번째 나는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며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세 번째는 나는 영적인 운동 선수로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가? 아니면 관중으로 살아가면 복음 사역에 관망하는 자인가? 오늘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고린도 도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아폴로 등의 신전이 많았고, 그 신전에 바쳤다가 남은 고기는 신전의 잔치에서 사용했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서 먹음으로 식탁에까지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나는 우상 숭배가 생각이 나고 양심에 걸려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주장하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화평하는 것이고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내려놓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에는 후원자 피후원자 문화가 있었습니다. 부자 후원자가 철학자 연설가를 돈으로 후원했고, 그들은 후원자를 칭찬하며 그 집에서 먹고 사는 사회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다른 연설가들처럼 돈을 받으며 사역하면, 사람들은 ‘저 사람도 결국 돈 벌려고 저러는 거지’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자비량을 택했습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생활을 하면서 사역을 했고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도였으면 교회가 사례비를 주어서 사역하게 했을 것인데 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주에는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달리 손으로 일을 하니까 사도로서의 급이 떨어지잖아? 그리고 말도 철학자들만큼 화려하지도 않잖아? 라고 하며 사도 바울의 권위와 사도권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진짜 사도가 맞아?”
이러한 사회적인 문화와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왜 사도의 권리를 내려놓고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도에게 사역의 보상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것을 설명하기 전에 사도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 사역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사역의 권리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바울은 먼저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밝힙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저 사람이 진짜 사도 맞아? 그는 손으로 일을 하니까 좀 급이 떨어지는 것 아냐” 라고 하며 사도 바울의 사도 됨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으로 얻은 열매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 9:1). 사도 바울이 예수 우리 주를 보았다고 한 이유는 사도의 자격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본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역으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열매가 나타난 것이 사도적 사역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짜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전 9:2).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사도 됨을 의심한다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사도 됨으로 인하여 주 안에서 인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사도라는 증거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너희 자신을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했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복음 사역에서 열매로 증명된 하나님의 일군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을 할 때에 자신의 직함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나타나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말씀으로 양을 먹이고, 눈물로 기도하고, 성도들의 영혼이 자라고 변화가 일어나는 사역의 열매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이서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한 것이 이것이니.”(고전 9:3)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사도라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리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답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사도의 권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야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3-6).
사도 바울은 먹과 마시는 권리에 대하서 말합니다. 이는 밥 먹을 자유가 아니라,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인 것입니다. 즉 사례비와 목회 활동비 등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동행하며 사역을 했습니다. 이는 부부가 동행 여행이 아니라, 사역자의 가정 전체가 보호와 돌봄을 받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는 생업을 내려놓고 사역에 전념할 권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비량을 택했지만, 원래는 사역자는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회가 뒷받침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회가 마음 편하게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 보장은 교회의 호의가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역자의 가정이 경제적 압박과 불안 속에 있으면 사역이 흔들리고 사역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예를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7-9).
사도 바울은 군인과 농부 목자를 비유를 설명합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싸울 때에 나라가 생활비를 책임지는게 당연하고, 농부가 자기 포도원에서 추수한 후에 열매를 맛볼 권리가 있으며, 목자가 양에게서 나오는 젖과 털로 유익을 얻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도 사역의 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생활하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명기 말씀의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는 소도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그 곡식을 먹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리고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9-11). 사도 바울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영적인 말씀을 전하는 자는 교회로부터 육신의 것을 얻는 것이 당연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레위인과 제사장은 땅의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업이 되셔서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 때에 드린 곡물과 제육, 그리고 가죽등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인의 몫으로 돌리셨고, 레위인들이 드린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성전과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활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시며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가르친 사도의 권리를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두 가지의 극단적인 관점을 피해야 합니다. 먼저는 ‘목사님은 무조건 다 옳다. 재정은 묻지도 말자.’라는 것은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재정은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고 성도님들도 재정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과도한 의심입니다. 사역자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세속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사례비나 복지에 대하여 방어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에 대하여 재정은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의 정당한 권리는 인정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자는 최소한의 생활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관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종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책임지고, 어떻게 함께 짐을 져야 하는 가? 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역자를 무조건으로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 내려 놓았습니다.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지원받고,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가정과 함께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세상 일을 내려놓고 복음 사역에만 전념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가 사례비를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스스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진실되게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 누구든지 내 사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 9:15).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말한 것은 자신에게 대우를 잘 해 달라는 의미도 아니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자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제 생활비 예기 꺼내려는 거구나, 앞으로라도 우리보고 더 대접해 달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앞으로 나에게 그렇게 대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 권리를 누리게 해 달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이 이러한 교리를 말하는 것은 요구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이라고 하며 마음에 있는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사역의 동기가 돈과 연결하거나 동기를 의심받는 일을 겪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자랑이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으로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돈으로 연결해서 비난하는 것으로 복음 사역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가치와 권위가 폄하되지 않게 하도록 계속해서 자비량으로 사역하겠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하는 사역이 결코 자랑이 아니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도리어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임으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7-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원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을 얻지만, 억지로 사명을 감당하더라도 직분자로서 감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듯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기에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궁극적인 상은 복음을 값 없이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 우리의 상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상은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 권리를 내려 놓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높임을 받고 많은 보상을 받음으로 격려를 받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느냐로 자신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겼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방식을 존중했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어 언어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 약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복음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종이 되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을 위한 사역자는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고린도 에서는 해마다 이스미아 경기장에서 열리는 큰 경기가 열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운동장에서 여러명이 달리기를 하지만 상 받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뛰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의 경주자가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하여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운동 선수는 시합을 앞두고 훈련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합니다. 먹는 것도 절제하고 자는 것도 절제하고, 취미 생활도 절제합니다. 왜냐하면 절제하지 않으면 운동 시합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얻는 것은 썩을 면류관인 것입니다. 당시에 우승한 자는 월계관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 상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들고, 썩어 버리는 관입니다. 사람들의 박수와 자신의 명성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여가야 합니다. 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향방 없는 것은 목표가 없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과 게으름, 편안함을 추구하는 본성까지 모두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분이나 환경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되심을 인정하며 복음을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할까 염려하며 거룩한 두려움으로 믿음의 경주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마주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나는 나의 권리와 자존심이 복음의 유익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두 번째 나는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며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세 번째는 나는 영적인 운동 선수로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가? 아니면 관중으로 살아가면 복음 사역에 관망하는 자인가? 오늘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