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열매 (고전 1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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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552회 작성일 24-01-19 16:27본문
사랑의 열매 (고전 13: 1-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4-7)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모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 있게 살고 인생의 목포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텅 빈 삶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헤밍웨이 같은 위대한 문인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지만, 그는 극단적으로 불행을 느끼고 자살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외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에는 공허와 절망을 느끼게 될까요?
그 이유는 삶의 기쁨과 행복의 핵심요소인 사랑의 결핍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외면적인 환경이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내면적인 사랑의 결핍증에 걸리면 결코 행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하여 깨달아야 할 진리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첫째, 사랑이 없는 성취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를 말합니다.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너도 나도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적인 언어인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 이 시대에 더욱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있는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게 되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외면적인 것이고 내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해서 말할 수가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미래를 내려다 볼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서 미래의 정치와 경제에 대하여 미리 볼수 있는 안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알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정말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또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도 놀라운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기업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켜 수천명을 고용하고 지역과 나라를 부강케 하는 이러한 일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념의 사람으로 칭찬을 받고 박수를 해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와같이 예언하는 능을 가진 사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를 번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물질로 구제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를 제물로 드릴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근에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테러의 제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미움과 증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릴때는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사람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몸에 지니고, 함께 아멘하고, 함께 할렐루야 노래하며, 함께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으로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던질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다 크리스챤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도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구분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의미가 있으며, 사랑이 빠진 능력과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의 기준이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34-35).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에 관하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의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이 없이 행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통하여 함께 조명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래 참는 다는 의미는 화를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실수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성장할 시간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지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고 사랑이 없으면 오래 참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증거는,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오래 참는것입니다. 자녀가 대변, 소변 못 가리더라도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더라도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오래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사랑이 있다면 이해하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내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의 거역함을 오래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래 참고 길이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고 동정하고 오래 참느냐에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온유의 헬라어는 ‘프리이테스’ 로 논쟁하기 좋아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완고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온유는 죄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힘 사용하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온유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 14-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 절은 온유함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다 너도 시험을 받을가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 6: 1-3). 우리가 사랑하면 온유한 자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은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를 향하여 따뜻하게 대하는 온유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질투를 의미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가 잘 된다고 질투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절대로 자녀를 모함하거나 중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며 마음인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아내가 잘되는 것을 결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잘되면 아내가 기뻐하며, 아내가 잘되면 남편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웃이 잘되면 박수를 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웃이나 성도를 사랑하는 가를 보려면, 내가 그들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을 자꾸 하면 그것을 듣는 남들은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져다 줍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은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써 살아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 이만하면 되었다. 나만한 사람이 없다. 나 같이만 되어라.” 이러 것이 모두가 자만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교만한 마음으로 우쭐대면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언제나 높여주고 상대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는 겸손함으로 상대를 세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리는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여주고 칭찬해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무례한 말로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른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예의 바르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21 절에는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무례히 행하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녀가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남을 잘되도록 돌보아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잘되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한 아름다운 유태인 여학생을 본 순간 교수가 학생에게 그만 활짝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프로포즈해서 결혼했습니다. 수재로 알려졌던 그는 졸업 후에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가정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가에서 “유태인 아내와 이혼을 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떠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가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고, 아내를 만난 것 또한 자기 인생에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치 독일 하에서 유대인을 박멸할 때였습니다.
대학 당국에서는 대학교수로 남기 위해서는 유대인 아내와 결별을 하든지 유대인 아내와 살기를 원하면 대학 교수직을 사표 내라. 너무나 선택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야스퍼스는 아내를 택하고 교수직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유태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 활동, 강연, 여행 모두를 봉쇄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바깥에 초인종 소리만 나도 진땀을 흘렸습니다. 8년 뒤에 마침내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든지 왜냐하면 가문에 영광이요, 일신의 출세인 독일대학의 철학과 교수직도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짝같이 내어 던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아내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위험하게 내놓은 그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왜 야스퍼스가 교수직까지 포기하고 모든 불이익을 감수했습니까?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 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는 성은 자신에게는 간단한 것이지만 이웃에게는 비수로써 찌르는 상처를 내게 됩니다. 적게 성내는 것은 작은 상처를 주지만, 크게 성내는 것은 크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성을 내게 되면 반드시 상대방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성을 내면 그 부부의 화합을 다시 이루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성내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2 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20 절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고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악한 생각이 아니라, 선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피해를 당하기도 하고 누명을 쓸데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칫하면 악한 생각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절제하여 마음에 선한 마음으로 가득채워야 합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 15).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란 바르지 않는 삶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길이 불의의 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의 길을 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을 가르쳐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리를 기뻐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 있으면 예수님을 기뻐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참으며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망의 길에 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와 죄는 이미 형벌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자라나 성숙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식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 35, 37).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를 향하여 인내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존 우드 브릿지 목사는 16대에 걸쳐 목사를 배출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신앙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늘 경건의 시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에 의하여 교회에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교를 가기를 원했지만 브릿지 목사는 거절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저는 예수를 믿지 많아요. 그러므로 저는 아버지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될 수 없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브릿지 목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주야로 기도하며, 인내와 사랑을 베풀고 기다렸습니다. 훗날 브릿지 목사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당시 부모님은 나에게 실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가서 16대째 목사가 되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태양이 빛의 모체이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고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7-8 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축복하며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4-7)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모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 있게 살고 인생의 목포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텅 빈 삶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헤밍웨이 같은 위대한 문인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지만, 그는 극단적으로 불행을 느끼고 자살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외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에는 공허와 절망을 느끼게 될까요?
그 이유는 삶의 기쁨과 행복의 핵심요소인 사랑의 결핍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외면적인 환경이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내면적인 사랑의 결핍증에 걸리면 결코 행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하여 깨달아야 할 진리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첫째, 사랑이 없는 성취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를 말합니다.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너도 나도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적인 언어인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 이 시대에 더욱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있는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게 되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외면적인 것이고 내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해서 말할 수가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미래를 내려다 볼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서 미래의 정치와 경제에 대하여 미리 볼수 있는 안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알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정말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또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도 놀라운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기업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켜 수천명을 고용하고 지역과 나라를 부강케 하는 이러한 일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념의 사람으로 칭찬을 받고 박수를 해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와같이 예언하는 능을 가진 사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를 번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물질로 구제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를 제물로 드릴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근에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테러의 제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미움과 증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릴때는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사람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몸에 지니고, 함께 아멘하고, 함께 할렐루야 노래하며, 함께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으로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던질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다 크리스챤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도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구분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의미가 있으며, 사랑이 빠진 능력과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의 기준이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 34-35).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에 관하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의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이 없이 행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통하여 함께 조명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래 참는 다는 의미는 화를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실수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성장할 시간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지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고 사랑이 없으면 오래 참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증거는,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오래 참는것입니다. 자녀가 대변, 소변 못 가리더라도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더라도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오래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사랑이 있다면 이해하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내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의 거역함을 오래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래 참고 길이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고 동정하고 오래 참느냐에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온유의 헬라어는 ‘프리이테스’ 로 논쟁하기 좋아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완고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온유는 죄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힘 사용하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온유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 14-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 절은 온유함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다 너도 시험을 받을가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 6: 1-3). 우리가 사랑하면 온유한 자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은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를 향하여 따뜻하게 대하는 온유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질투를 의미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가 잘 된다고 질투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절대로 자녀를 모함하거나 중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며 마음인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아내가 잘되는 것을 결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잘되면 아내가 기뻐하며, 아내가 잘되면 남편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웃이 잘되면 박수를 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웃이나 성도를 사랑하는 가를 보려면, 내가 그들을 향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을 자꾸 하면 그것을 듣는 남들은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져다 줍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은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써 살아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 이만하면 되었다. 나만한 사람이 없다. 나 같이만 되어라.” 이러 것이 모두가 자만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교만한 마음으로 우쭐대면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언제나 높여주고 상대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는 겸손함으로 상대를 세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리는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여주고 칭찬해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무례한 말로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른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예의 바르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21 절에는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무례히 행하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녀가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남을 잘되도록 돌보아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잘되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한 아름다운 유태인 여학생을 본 순간 교수가 학생에게 그만 활짝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프로포즈해서 결혼했습니다. 수재로 알려졌던 그는 졸업 후에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가정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가에서 “유태인 아내와 이혼을 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떠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가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고, 아내를 만난 것 또한 자기 인생에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치 독일 하에서 유대인을 박멸할 때였습니다.
대학 당국에서는 대학교수로 남기 위해서는 유대인 아내와 결별을 하든지 유대인 아내와 살기를 원하면 대학 교수직을 사표 내라. 너무나 선택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야스퍼스는 아내를 택하고 교수직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유태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 활동, 강연, 여행 모두를 봉쇄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바깥에 초인종 소리만 나도 진땀을 흘렸습니다. 8년 뒤에 마침내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든지 왜냐하면 가문에 영광이요, 일신의 출세인 독일대학의 철학과 교수직도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짝같이 내어 던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아내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위험하게 내놓은 그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왜 야스퍼스가 교수직까지 포기하고 모든 불이익을 감수했습니까?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 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는 성은 자신에게는 간단한 것이지만 이웃에게는 비수로써 찌르는 상처를 내게 됩니다. 적게 성내는 것은 작은 상처를 주지만, 크게 성내는 것은 크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성을 내게 되면 반드시 상대방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성을 내면 그 부부의 화합을 다시 이루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성내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2 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20 절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고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악한 생각이 아니라, 선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피해를 당하기도 하고 누명을 쓸데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칫하면 악한 생각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절제하여 마음에 선한 마음으로 가득채워야 합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 15).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란 바르지 않는 삶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길이 불의의 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의 길을 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을 가르쳐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리를 기뻐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 있으면 예수님을 기뻐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참으며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망의 길에 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와 죄는 이미 형벌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자라나 성숙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식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 35, 37).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를 향하여 인내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존 우드 브릿지 목사는 16대에 걸쳐 목사를 배출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신앙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늘 경건의 시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에 의하여 교회에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교를 가기를 원했지만 브릿지 목사는 거절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저는 예수를 믿지 많아요. 그러므로 저는 아버지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될 수 없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브릿지 목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주야로 기도하며, 인내와 사랑을 베풀고 기다렸습니다. 훗날 브릿지 목사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당시 부모님은 나에게 실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가서 16대째 목사가 되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태양이 빛의 모체이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고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7-8 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축복하며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