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안을 누리자(눅 8:22-25).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632회 작성일 23-12-30 16:59본문
마음의 평안을 누리자(눅 8:22-25).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4).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곤하신 예수님은 잠이 드셨는데 갑자가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부 출신들이 많아서 처음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제어하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고 배가 점점 위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일어나셔서 우리를 도와 돌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게 되고 마침내 호수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고 하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나자 제자들의 마음에도 풍랑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풍랑의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킴으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잠언서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킬수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삶의 중심인 마음인 것입니다. 큰 배를 움직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곳은 조종실입니다. 큰 풍랑이 찾아왔을 때에 조종실을 잡고 있는 선장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잘 조종한다면 그 배는 평안히 항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실의 승무원이 항해중에 술 취하고 방탕하여 제대로 조종하지 않거나, 훈련이 되지 않아 위기에 대응할수 없다면 그 배는 좌초될 가능성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마음의 평강을 누릴수 있다면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하여 고든 맥도널도는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이라는 책을 통하여 두 가지의 인생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쫓겨 다니는 인생이며 다른 하나는 부름받은 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쫓겨다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수면의 부족으로 인한 만성적인 피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 결과로 삶의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쫓겨다니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성취했을때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자녀들에게도 끊임없는 성취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소유욕이나 권력욕에 사로잡히는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나 가족들의 영적인 삶에는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삶에서 도시의 싱크홀과 같이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대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생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쫓겨다니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왕이 되고 평안을 누릴수 있었지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죽을때까지 쫓겨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다윗을 쫓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울왕이 자신의 죄와 질투심에 쫓겨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분노와 원한에 붙들려서 쫓겨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가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었고 단지 자신의 자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항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임을 고백하기에 자아에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고자 열망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시간을 사용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은 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잘 사용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루가 중요하고, 한시간, 일분이 중요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28살 나이로 사형장에 서게 되었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5분을 "2분은 유언, 2분은 생활 정리, 1분은 자신을 돌아보겠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가족을 생각하는 동안 2분이 지나가 버렸고 '남은 3분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28년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앞이 캄캄해졌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시간을 좀더 아껴 쓰고 가치 있는 삶을 살걸! 다시 한 번 살 수만 있다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실탄을 장전하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때 갑자기 말을 탄 한 병사가 흰 기를 흔들면서 달려왔답니다. 황제의 특사가 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을 면했고, 그 후 마지막 5분을 기억하며 시간의 고귀함을 간직하고 영혼의 문제에 심취하여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시간의 청지기로 시간을 잘 경영해야 합니다.
시간은 금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잘 다스리는 삶은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특징은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아셨고, 그 사명에 맞추어서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자는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시간을 따로 내어서 잃은 영혼을 찾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셨고,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모아서 훈련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훈련하는 일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시간 관리를 훈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늘 쫓기다 보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급한 일과 일상의 일에 시간을 모두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저도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목양을 해야 하고, 설교자로서 일주일에 네 번 설교를 하며, 교사로서 제자사역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필요시 개인 심방을 하기도 하고 성도님들을 심방하며 격려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자녀들의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사님들과의 회의를 해야 하고, 학생부 청년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모임이나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설에 어려움이 있으면 시설을 고치는 일에 서비스 회사를 불러야 합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기도와 말씀 묵상, 그리고 영적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운동에 시간을 내야 합니다. 친교회적으로는 목사님들과의 친교 및 사역들도 감당해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사역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ㄴ다.
우리는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라는 질문을 항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시간을 잘 사용할 때에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지식을 얻기 보다는 오락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오락(amusement)의 의미는 ‘생각 없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없는 활동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서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사고해야 하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은 어디에서 얻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주야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지식보다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지혜가 시작되는 것이며, 그 지혜의 바탕위에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장하시면서 지혜가 자라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독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빼놓을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 영적인 책을 읽으면서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유대인의 역사와 책의 민족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강해 책을 읽으며 묵상하고 있습니다. 저의 서재에는 제가 읽은 책들이 쌓여졌습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쌓으며, 더 나아가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만 있으면 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의 차에도 책이 있고 집에도 있으며 목양실에도 있습니다. 책은 저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서 뿐만 아니라, 경청하는 삶을 통해서 지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의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배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영적인 멘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멘토는 자신에게 필요한 답을 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보다는 듣기에 우선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음으로써 지혜를 배울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올해 발견한 탁월한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인생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 폭풍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풍요함으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시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4)
우리에게는 영과 혼, 그리고 육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을 보통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영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훈련은 경건의 훈련인데, 이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있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됩니다. “지난 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찾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묵상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묵상하는 삶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위해서 하루의 시간을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은 가장 행복으로 연결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 입력되어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행동인 것입니다. 특히 중보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에 평안함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의 혼돈된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고, 걱정이 가득한 마음에 평안함을 주며, 슬픔이 가득한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삶의 평안의 열쇠입니다. 우리가 성숙할수록 자신의 기도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올림픽 육상 챔피언인 에릭 리델은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올림픽에서 400m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금메달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교사로 가게 되고, 후에 일본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기쁨과 온전한 인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와 함께 있었던 여인에게 리델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었던 부인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매일 아침에 그는 보초들의 시선을 피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에 성경과 노트를 놓고 기도와 묵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에릭 리델은 비록 감옥에 수용되었지만, 그는 조금의 불을 비추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의 삶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린 믿음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리델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견고한 버팀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와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늘 평안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력이 넘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풍성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예배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을 충만히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쉼을 통한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2).
런던의 한 행상인은 영국의 정치가 샤프츠버리 경에게 말하기를 1주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는 당나귀는 짐을 지고서 하루에 30마일 이상을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1주일 중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당나귀는 하루에 15마일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일하는 당나귀는 그렇지 않은 당나귀보다 그만큼 손해가 더 많으며 병들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1주일 중에 하루를 쉬면서 일하는 당나귀는 그렇지 못한 당나귀보다 더 많이 일을 하고도 생김새가 아주 말쑥해 보였습니다.
스위스의 해글러 박사는 산소량에 대한 실험을 통해 안식일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날임을 입증하였습니다. 평일에는 밤에 휴식을 취하면서 얻게 되는 산소의 양보다 낮에 일을 하여서 잃게 되는 산소의 양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일 동안에 수고하여 잃게 된 산소의 양은 안식일에 모두 보충할 만큼 축적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1주일 내내 일을 계속하면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은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생산량이 30% 감소해 일주일을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 30% 감소돼 레닌 역시 일주일을 다시 7일로 되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창세기의 안식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은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하며 쉼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쉼을 얻는 소중한 시간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 제도를 불법화하는 역사적인 법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기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가 분주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큰 일을 감당했던 이유는 견제와 균형의 훈련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견제와 균형은 바로 주일에 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버포스는 자살한 다른 정치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평화로운 일요일이 그들에게 있었던들 그들의 생명줄이 심한 긴장으로 끊어지는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윌버포스가 지적한 것처럼 쉼이 없는 전진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무척이나 피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안식이 필요합니다. 주중의 하루의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안식하는 시간은 재충전의 시간이 되어 한주를 새롭게 시작하는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휴가의 시간을 통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한 쉼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너무 분주한 곳에 몰아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몸이 병이 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과 쉼,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사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뜻하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소중합니다.
프레드 미첼은 책상 앞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놓았습니다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로 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는 분주함 가운데 마음의 질서를 유지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삶의 소중함을 간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부요함을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4).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곤하신 예수님은 잠이 드셨는데 갑자가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부 출신들이 많아서 처음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제어하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고 배가 점점 위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일어나셔서 우리를 도와 돌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게 되고 마침내 호수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고 하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나자 제자들의 마음에도 풍랑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풍랑의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킴으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잠언서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킬수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삶의 중심인 마음인 것입니다. 큰 배를 움직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곳은 조종실입니다. 큰 풍랑이 찾아왔을 때에 조종실을 잡고 있는 선장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잘 조종한다면 그 배는 평안히 항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실의 승무원이 항해중에 술 취하고 방탕하여 제대로 조종하지 않거나, 훈련이 되지 않아 위기에 대응할수 없다면 그 배는 좌초될 가능성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마음의 평강을 누릴수 있다면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하여 고든 맥도널도는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이라는 책을 통하여 두 가지의 인생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쫓겨 다니는 인생이며 다른 하나는 부름받은 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쫓겨다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수면의 부족으로 인한 만성적인 피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 결과로 삶의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쫓겨다니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성취했을때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자녀들에게도 끊임없는 성취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소유욕이나 권력욕에 사로잡히는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나 가족들의 영적인 삶에는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삶에서 도시의 싱크홀과 같이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대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생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쫓겨다니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왕이 되고 평안을 누릴수 있었지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죽을때까지 쫓겨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다윗을 쫓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울왕이 자신의 죄와 질투심에 쫓겨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분노와 원한에 붙들려서 쫓겨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가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었고 단지 자신의 자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항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임을 고백하기에 자아에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고자 열망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시간을 사용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은 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잘 사용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루가 중요하고, 한시간, 일분이 중요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28살 나이로 사형장에 서게 되었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5분을 "2분은 유언, 2분은 생활 정리, 1분은 자신을 돌아보겠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가족을 생각하는 동안 2분이 지나가 버렸고 '남은 3분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28년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앞이 캄캄해졌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시간을 좀더 아껴 쓰고 가치 있는 삶을 살걸! 다시 한 번 살 수만 있다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실탄을 장전하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때 갑자기 말을 탄 한 병사가 흰 기를 흔들면서 달려왔답니다. 황제의 특사가 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을 면했고, 그 후 마지막 5분을 기억하며 시간의 고귀함을 간직하고 영혼의 문제에 심취하여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시간의 청지기로 시간을 잘 경영해야 합니다.
시간은 금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잘 다스리는 삶은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특징은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아셨고, 그 사명에 맞추어서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자는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시간을 따로 내어서 잃은 영혼을 찾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셨고,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모아서 훈련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훈련하는 일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시간 관리를 훈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늘 쫓기다 보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급한 일과 일상의 일에 시간을 모두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저도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목양을 해야 하고, 설교자로서 일주일에 네 번 설교를 하며, 교사로서 제자사역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필요시 개인 심방을 하기도 하고 성도님들을 심방하며 격려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자녀들의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사님들과의 회의를 해야 하고, 학생부 청년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모임이나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설에 어려움이 있으면 시설을 고치는 일에 서비스 회사를 불러야 합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기도와 말씀 묵상, 그리고 영적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운동에 시간을 내야 합니다. 친교회적으로는 목사님들과의 친교 및 사역들도 감당해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사역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ㄴ다.
우리는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라는 질문을 항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시간을 잘 사용할 때에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지식을 얻기 보다는 오락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오락(amusement)의 의미는 ‘생각 없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없는 활동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서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사고해야 하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은 어디에서 얻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주야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지식보다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지혜가 시작되는 것이며, 그 지혜의 바탕위에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장하시면서 지혜가 자라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독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빼놓을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 영적인 책을 읽으면서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유대인의 역사와 책의 민족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강해 책을 읽으며 묵상하고 있습니다. 저의 서재에는 제가 읽은 책들이 쌓여졌습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쌓으며, 더 나아가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만 있으면 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의 차에도 책이 있고 집에도 있으며 목양실에도 있습니다. 책은 저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서 뿐만 아니라, 경청하는 삶을 통해서 지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의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배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영적인 멘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멘토는 자신에게 필요한 답을 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보다는 듣기에 우선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음으로써 지혜를 배울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올해 발견한 탁월한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인생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 폭풍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풍요함으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시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4)
우리에게는 영과 혼, 그리고 육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을 보통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영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훈련은 경건의 훈련인데, 이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있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됩니다. “지난 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찾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묵상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묵상하는 삶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위해서 하루의 시간을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은 가장 행복으로 연결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 입력되어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행동인 것입니다. 특히 중보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에 평안함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의 혼돈된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고, 걱정이 가득한 마음에 평안함을 주며, 슬픔이 가득한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삶의 평안의 열쇠입니다. 우리가 성숙할수록 자신의 기도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올림픽 육상 챔피언인 에릭 리델은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올림픽에서 400m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금메달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교사로 가게 되고, 후에 일본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기쁨과 온전한 인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와 함께 있었던 여인에게 리델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었던 부인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매일 아침에 그는 보초들의 시선을 피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에 성경과 노트를 놓고 기도와 묵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에릭 리델은 비록 감옥에 수용되었지만, 그는 조금의 불을 비추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의 삶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린 믿음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리델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견고한 버팀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와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늘 평안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력이 넘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풍성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예배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을 충만히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쉼을 통한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2).
런던의 한 행상인은 영국의 정치가 샤프츠버리 경에게 말하기를 1주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는 당나귀는 짐을 지고서 하루에 30마일 이상을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1주일 중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당나귀는 하루에 15마일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일하는 당나귀는 그렇지 않은 당나귀보다 그만큼 손해가 더 많으며 병들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1주일 중에 하루를 쉬면서 일하는 당나귀는 그렇지 못한 당나귀보다 더 많이 일을 하고도 생김새가 아주 말쑥해 보였습니다.
스위스의 해글러 박사는 산소량에 대한 실험을 통해 안식일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날임을 입증하였습니다. 평일에는 밤에 휴식을 취하면서 얻게 되는 산소의 양보다 낮에 일을 하여서 잃게 되는 산소의 양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일 동안에 수고하여 잃게 된 산소의 양은 안식일에 모두 보충할 만큼 축적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1주일 내내 일을 계속하면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은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생산량이 30% 감소해 일주일을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 30% 감소돼 레닌 역시 일주일을 다시 7일로 되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창세기의 안식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은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하며 쉼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쉼을 얻는 소중한 시간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 제도를 불법화하는 역사적인 법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기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가 분주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큰 일을 감당했던 이유는 견제와 균형의 훈련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견제와 균형은 바로 주일에 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버포스는 자살한 다른 정치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평화로운 일요일이 그들에게 있었던들 그들의 생명줄이 심한 긴장으로 끊어지는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윌버포스가 지적한 것처럼 쉼이 없는 전진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무척이나 피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안식이 필요합니다. 주중의 하루의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안식하는 시간은 재충전의 시간이 되어 한주를 새롭게 시작하는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휴가의 시간을 통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한 쉼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너무 분주한 곳에 몰아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몸이 병이 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과 쉼,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사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뜻하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소중합니다.
프레드 미첼은 책상 앞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놓았습니다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로 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는 분주함 가운데 마음의 질서를 유지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삶의 소중함을 간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부요함을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