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가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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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927회 작성일 24-10-26 21:56본문
전도가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려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이번 친교회의 주제가 ‘다시 구령의 열정으로 (Again 1954)’이었습니다. 1954년은 아이크 포스터 선교사님이 한국에 성서침례친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오신 해입니다. 포스터 선교사님과 그 후에 오신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선교 사역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에 성서침례친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선교사역에서 성서침례친교회가 다른 교파와의 차별성이 있다면 ’오직 복음으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바른 교리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우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기에 온 열정을 다했습니다. 성서침례교회가 한국에 진리에 근거한 교회를 세우고 구령의 열정으로 영혼을 구원하기에 힘썼던 이유는 미국의 근본주의 역사에 그 배경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에 침투하면서 미국 교계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를 외치며 복음의 열정으로 일어났던 운동이 근본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스펄전 목사님이 근본주의 운동에 앞장섰고, 미국에서는 디엘 무디, 그리고 알에이 토레스, 그리고 남침례교회에서는 프랭크 목사님이 성서침례친교회를 시작하면서 구령에 기초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근본주의 교회들의 특징은 강한 구령 사역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의 1960-1990년대까지 근본주의 독립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에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해몬드 제일침례교회에서 잭 하일스 목사님의 사역 당시에 2년 동안 매주말마다 하루에 6-7시간을 개인 구령을 위해서 헌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마다 한 신학생과 함께 해몬드 근처의 지역을 다니며 축호 전도를 하며 구령의 열정에 불탄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모세였고 인디언 출신 신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제 기억으로는 나이가 약 50세 이상 되었던 분인 걸로 기억이 납니다. 이 분에게서 기억되어지는 것은 미국의 나무로 된 문을 노크를 많이 해서 손가락 관절이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마도 수만 가구 이상의 집을 두드리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의 근본주의 침례교회의 중심이 되는 교회들의 사역은 구령 중심의 사역입니다. 해몬드 교회와 하일스 앤더슨 신학교는 지금도 구령 사역에 집중하고 있고, 폴 채플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랭캐스터 침례교회도 매주 토요일이면 구령자들이 모여서 구령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교회도 지난 2007년부터 2020 백만명 구령운동을 선포하며 구령의 열정으로 함께 달려왔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친교회의 방향성을 구령 사역에 두며 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마다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지난 구령 운동을 통해서 수만명의 영혼의 추수가 일어났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백만명 구령운동을 진행하면서 추수의 절정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부터 30-40년 전에는 영혼들이 순수했고 갈급했습니다. 제가 학생 사역을 할 때에 많은 청소년들을 교회로 초청하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목포에서도 구령과 제자 사역을 통해서 부흥이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그리고 코로나를 거친 후에 AI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무척이나 낮아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구령 사역 뿐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의 사역도 쉽지 않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포스트 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철학 사조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에서는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기에 다양성을 주장하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철학은 우리가 굳게 믿는 보편적인 성경적인 기준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생명은 배아에서 시작됨을 믿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낙태를 허용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젠더에서 남녀 두 성별을 수천년간 사회에서 수용되어 졌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구 사회에서는 성별을 남자와 여자만을 주장하면 편협적이고 무지하다라는 사회적인 비판을 받습니다. 특히 서구에서는 강단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체포되어 구속까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이제 사람들의 가치에 따라 다시 평가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사회가 점점 세속화 개인주의화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하게 했지만, 공동체라는 의식 구조에서 개인주의로 급속하게 바뀌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통을 이제는 대화가 아닌 카톡이나 문자로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서로 네트워크가 되어 있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즉시 접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tv 를 시청하지 않고 모든 정보를 유튜브에서 얻고 있으며, 많은 시간을 개인적으로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를 접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의식에서 개인주의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의 사역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1 세기의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을 통과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극복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도전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의 율법주의에 맞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헬라 철학과 신화에 동조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순수한 복음의 사역은 큰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은 당시의 철학이나 무관하게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만을 신뢰하며 복음 사역에 힘을 썼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였기에 피흘림의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모진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이며 지혜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구령하는 교회의 비전과 정체성을 세워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복음의 등불을 들고 세상으로 매주 사역하시는 귀한 장년부 집사님들과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복음의 불씨가 살아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목포에 있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역에 희망이 있습니다.
2. 우리는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듯이, 우리도 세상의 장벽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를 대체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영혼 구원의 열정을 품고 다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구령은 교회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령은 예수님이 교회에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삶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얻게 합니다.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과 사역이 형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삶에 초점을 맞출 때에 가정과 교회가 형통한 은혜를 얻게 합니다.
구령하는 교회의 열매는 영혼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순종하면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초대 교회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오순절에는 삼천명이나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리라.”(행 5:42).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전도하기를 쉬지 않을 정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 전도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복음 전도의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영혼 구원에 대한 영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신이 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암 연구소를 방문하여 한 과학자에게 '당신이 암 연구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 셈입니까?'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어떻게 하다니요?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야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암을 연구하여 성공하고서도 그냥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알면서 그대로 있다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임은 어떠한가요? 인간의 죄의 결과를 알고 그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아는 자라면 세상에 대한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큰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2. 복음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사람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무를 포기하기는 쉽지만 권리를 포기하기는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진주를 얻었기에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우심으로 인간으로 오셨고 더 나아가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서 사회적인 지위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세상적인 지식과 지위, 배경을 모두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에게 있는 자유함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처럼 음식을 구별하여 먹었던 것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그는 더 많은 영혼을 얻고자 했기에,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종의 모습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에 복음이 높아지기 때문이며,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살때에, 그들이 주님께로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섬기는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영혼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달려가는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절제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삶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고전 9:27).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은 자신의 시간을 절제하여 학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학생들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고, 친구들 만나 놀러다니고 있을 때에, 그는 도서관에 앉아서 집중하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절제하여 자신이 목표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의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절제함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도의 비전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 전도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를 만나 섬기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을 절제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절제함으로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며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절제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여도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26).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는 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여도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1차, 2차,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는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고 그들을 제자삼는 사역이었습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비결은 목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힘과 에너지를 분산하게 되면 분주하지만 목표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비결은 힘과 열정을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곳에 집중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이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고, 새로운 영혼을 제자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영혼을 구령하여 제자삼는 비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올해 한 사람이 꼭 한 영혼을 전도하여 정착시키는 비전을 성취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만이,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천명을 전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년에 1명 이상은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전도에 집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도로 돕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지상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한 사람이 한 영혼을 전도하여 정착시키는 비전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려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이번 친교회의 주제가 ‘다시 구령의 열정으로 (Again 1954)’이었습니다. 1954년은 아이크 포스터 선교사님이 한국에 성서침례친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오신 해입니다. 포스터 선교사님과 그 후에 오신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선교 사역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에 성서침례친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선교사역에서 성서침례친교회가 다른 교파와의 차별성이 있다면 ’오직 복음으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바른 교리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우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기에 온 열정을 다했습니다. 성서침례교회가 한국에 진리에 근거한 교회를 세우고 구령의 열정으로 영혼을 구원하기에 힘썼던 이유는 미국의 근본주의 역사에 그 배경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에 침투하면서 미국 교계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를 외치며 복음의 열정으로 일어났던 운동이 근본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스펄전 목사님이 근본주의 운동에 앞장섰고, 미국에서는 디엘 무디, 그리고 알에이 토레스, 그리고 남침례교회에서는 프랭크 목사님이 성서침례친교회를 시작하면서 구령에 기초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근본주의 교회들의 특징은 강한 구령 사역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의 1960-1990년대까지 근본주의 독립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에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해몬드 제일침례교회에서 잭 하일스 목사님의 사역 당시에 2년 동안 매주말마다 하루에 6-7시간을 개인 구령을 위해서 헌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마다 한 신학생과 함께 해몬드 근처의 지역을 다니며 축호 전도를 하며 구령의 열정에 불탄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모세였고 인디언 출신 신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제 기억으로는 나이가 약 50세 이상 되었던 분인 걸로 기억이 납니다. 이 분에게서 기억되어지는 것은 미국의 나무로 된 문을 노크를 많이 해서 손가락 관절이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마도 수만 가구 이상의 집을 두드리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의 근본주의 침례교회의 중심이 되는 교회들의 사역은 구령 중심의 사역입니다. 해몬드 교회와 하일스 앤더슨 신학교는 지금도 구령 사역에 집중하고 있고, 폴 채플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랭캐스터 침례교회도 매주 토요일이면 구령자들이 모여서 구령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교회도 지난 2007년부터 2020 백만명 구령운동을 선포하며 구령의 열정으로 함께 달려왔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친교회의 방향성을 구령 사역에 두며 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마다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지난 구령 운동을 통해서 수만명의 영혼의 추수가 일어났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백만명 구령운동을 진행하면서 추수의 절정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부터 30-40년 전에는 영혼들이 순수했고 갈급했습니다. 제가 학생 사역을 할 때에 많은 청소년들을 교회로 초청하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목포에서도 구령과 제자 사역을 통해서 부흥이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그리고 코로나를 거친 후에 AI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무척이나 낮아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구령 사역 뿐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의 사역도 쉽지 않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포스트 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철학 사조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에서는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기에 다양성을 주장하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철학은 우리가 굳게 믿는 보편적인 성경적인 기준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생명은 배아에서 시작됨을 믿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낙태를 허용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젠더에서 남녀 두 성별을 수천년간 사회에서 수용되어 졌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구 사회에서는 성별을 남자와 여자만을 주장하면 편협적이고 무지하다라는 사회적인 비판을 받습니다. 특히 서구에서는 강단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체포되어 구속까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이제 사람들의 가치에 따라 다시 평가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사회가 점점 세속화 개인주의화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하게 했지만, 공동체라는 의식 구조에서 개인주의로 급속하게 바뀌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통을 이제는 대화가 아닌 카톡이나 문자로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서로 네트워크가 되어 있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즉시 접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tv 를 시청하지 않고 모든 정보를 유튜브에서 얻고 있으며, 많은 시간을 개인적으로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를 접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의식에서 개인주의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의 사역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1 세기의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을 통과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극복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도전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의 율법주의에 맞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헬라 철학과 신화에 동조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순수한 복음의 사역은 큰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은 당시의 철학이나 무관하게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만을 신뢰하며 복음 사역에 힘을 썼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였기에 피흘림의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모진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이며 지혜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구령하는 교회의 비전과 정체성을 세워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복음의 등불을 들고 세상으로 매주 사역하시는 귀한 장년부 집사님들과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복음의 불씨가 살아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목포에 있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역에 희망이 있습니다.
2. 우리는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듯이, 우리도 세상의 장벽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를 대체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영혼 구원의 열정을 품고 다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구령은 교회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령은 예수님이 교회에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삶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얻게 합니다.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과 사역이 형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삶에 초점을 맞출 때에 가정과 교회가 형통한 은혜를 얻게 합니다.
구령하는 교회의 열매는 영혼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순종하면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초대 교회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오순절에는 삼천명이나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리라.”(행 5:42).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전도하기를 쉬지 않을 정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 전도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복음 전도의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영혼 구원에 대한 영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신이 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암 연구소를 방문하여 한 과학자에게 '당신이 암 연구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 셈입니까?'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어떻게 하다니요?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야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암을 연구하여 성공하고서도 그냥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알면서 그대로 있다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임은 어떠한가요? 인간의 죄의 결과를 알고 그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아는 자라면 세상에 대한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큰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2. 복음의 종으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사람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무를 포기하기는 쉽지만 권리를 포기하기는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진주를 얻었기에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우심으로 인간으로 오셨고 더 나아가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서 사회적인 지위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세상적인 지식과 지위, 배경을 모두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에게 있는 자유함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처럼 음식을 구별하여 먹었던 것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그는 더 많은 영혼을 얻고자 했기에,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종의 모습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에 복음이 높아지기 때문이며,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살때에, 그들이 주님께로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섬기는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영혼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달려가는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절제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삶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고전 9:27).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은 자신의 시간을 절제하여 학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학생들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고, 친구들 만나 놀러다니고 있을 때에, 그는 도서관에 앉아서 집중하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절제하여 자신이 목표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의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절제함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도의 비전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 전도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를 만나 섬기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을 절제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절제함으로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며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절제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여도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26).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는 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여도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1차, 2차,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는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고 그들을 제자삼는 사역이었습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비결은 목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힘과 에너지를 분산하게 되면 분주하지만 목표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비결은 힘과 열정을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곳에 집중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이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고, 새로운 영혼을 제자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영혼을 구령하여 제자삼는 비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올해 한 사람이 꼭 한 영혼을 전도하여 정착시키는 비전을 성취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만이,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천명을 전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년에 1명 이상은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전도에 집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도로 돕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지상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한 사람이 한 영혼을 전도하여 정착시키는 비전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