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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5) -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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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25-07-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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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5) -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2장)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솔로몬은 금이나 은, 권세가 아니라 지혜를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왜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을까요? 솔로몬은 금이나 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지혜인줄 알았습니다. 지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의미는 ‘깊이 있는 깨달음,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스승을 통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원리를 배우며 분별력을 얻었습니다. 과거의 한자는 글을 배우면서 인생의 통찰력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철학이라는 뜻은 ‘필로 소피아’ 로서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에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구약은 지혜를 호크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단지 지식에 그치지 않고 기술과 윤리, 믿음의 통합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브살렐이 기술로 성막을 지은 것처럼 지혜로운 삶에서 기술을 아는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 같은 해외에서는 기술을 아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소피아 즉 지혜로 간주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가 없다면 평생 쌓아올린 탑이 무너질 수도 있고, 평생 모은 재산을 탕진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없다면 자신의 소중한 가정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찌니라.”(잠 4:7)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지혜가 제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인 이유는 지혜는 생명을 얻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잠 3:18).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생명을 얻게 하느냐 멸망의 길로 가느냐의 기로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죄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게 하며, 고상한 인격과 성품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삶의 방향을 바르게 결정하게 함으로 미래에 소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감으로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이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의 지혜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지혜로우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두 가지의 지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 지혜에 의존하게 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이성과 경험, 기술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열심히 연구하고 탐구함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손으로 땅을 개간하다가 그 후에 농사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소와 같은 동물을 이용하여 쟁기를 끌며 농사를 하면서 능률이 올랐습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전하면서 그 후에는 트랙터와 같은 농기구로 농사를 하다가, 이제는 드론으로 농사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농사도 스마트에서 디지털 즉 AI 로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을 유익하게 하지만, 사람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길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1912년 영국에서 역사상 가장 큰 배인 타이타닉 호가 출항을 해서 미국으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 배는 높이가 18층 건물의 높이인 53 m나 되었고, 길이 또한 269 m 나 되는 당시에 가장 거대하고 호화로운 배였습니다. 그 배의 운행을 책임진 선장은 에드워스 스미스로서 오십년 가량 배를 운행한 배테랑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력 인사들은 에드워드가 운행하는 배만 탈 정도로 당시의 최고의 선장이었습니다. 타이타닉 배의 일등석은 집 한 채 이상의 값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호화로운 항해였습니다. 당시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타이타닉의 첫 출항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타이타닉호가 한창 운행하고 있을 당시에, 다른 배인 캘리포이안호는 눈 앞에 빙산이 많은 것을 보고 주위 배에 무전으로 경고를 수차례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타이타닉 호는 그러한 거대한 배가 작은 얼음 정도는 그냥 부딪혀도 이상 없을 것이라 자만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얼음에 배가 좌초된 경우도 없었기에 누구도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타이타닉 호에 20 m의  거대한 빙산이 나타나자 갑자기 충동했습니다. 그 여파로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장이 승객 대피를 내렸지만, 사람들은 추워서 못 타겠다고 하면 침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 호는 침몰했고, 2,200명 중에 살아 남은 자는 71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와같이 당시에는 최고의 기술과 지혜를 모아 만든 역사적인 배였지만, 첫 출항에서 침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발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지혜는 한치 앞을 볼수 없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지혜에는 배에 구멍이 생기듯이 항상 결함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지혜는 때로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이 사람들의 사고와 생각을 편파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에 집단 심리에 의하여 큰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준 후에, 집단 학살을 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에 의하여 세뇌를 당했기에, 유대인은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을 포로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14-16세기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과 학문을 부흥시키는 운동이엇습니다. 그 시기에는 사람들의 지혜와 문화가 꽃을 피운 황금기였습니다. 탁월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고, 화가들이 탁월한 그림을 그리고, 조각가들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조각하면서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의 지혜가 중심이 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람의 이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가 중요시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예술가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남기면서 사람의 우월함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켈란 제로의 다윗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상을 조각하면서 성경적인 사실보다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햇습니다. 다윗의 누드상을 조각하며 할례하지 않은 모습을 그리면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예술작품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르네상스 운동이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문화와 예술, 철학 운동으로 인하여 19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신학보다 이성이 우선시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기적, 부활등이 부정되기 시작했고, 진화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근의 세상의 지혜는 과학 기술로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앞으로 AI 기술로 사람의 질병을 정복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은 미래에 사람과 AI 는 연결되는 세상이 될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AI가 연결되어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존재를 만드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특별히 뼈 수술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사람의 뇌에 컴퓨터 AI 와 연결될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더 나은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를 합니다. 성경은 죽음은 죄의 결과롤 찾아오는 것인데, 과학 기술은 뇌의 기억을 저장한 후에 다른 육체나 인조로 만든 인간에 이식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황당한 설정이 실제로 일어날 것 같은 시대를 열고자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다 여기며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자기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을 남자와 여자 외에 다른 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동성이 함께 살며 아기를 입양하는 것을 미화하며 아름다운 사랑 또는 가정이라고 추켜 세웁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남자와 여자 두 성만 존재한다고 하면 사회적 차별을 받을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실직 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고소를 하면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만 히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길잃은 양과 같이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창조자 되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는 이 세상 지혜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진리의 길을 얻습니다. 성경은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가야 합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에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당시의 철학자들이 화려한 언어와 논리로 사람들을 이성으로 감동시키곤 했지만, 사도 바울은 지혜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3).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복음만을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의 핍박으로 마음과 육체가 지쳐 있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자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거절당하자 큰 상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복음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이었기에 거절과 핍박으로 큰 시련이 찾아와 약했지만,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사람의 지혜대로 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지혜와 다른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지혜가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비밀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비밀을 감추셨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은 어리석게 바라보며 무심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가장 값진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2-3)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로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이신 이유는 예수님이 구원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열쇠는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세상에 감추셨는데, 그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메시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메시야로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은 세상의 지혜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른 한 선지자나 위인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세상의 눈으로 예수님의 위대하신 구속의 사역을 볼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혜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세상 지식을 가진 박사나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주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녀들은 이제 세상의 가치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믿음의 가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기에 그 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의 원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하신 것은, 천국에 보관된 영적 자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천국이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이를 것이고, 우리가 천국에서 우리가 쌓은 보물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지혜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 그 존중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존중을 받고 싶다면 아내를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면 자녀들의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다른 직원을 존중하는 것이 자신이 존중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아내와 자녀, 부모님, 그리고 직원들을 존중하는 방식은 각자가 처한 상황대로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과 태도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가장 소중한 지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3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의 계명이며, 그리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은혜는 우리가 세상 지혜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4).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밀로 감추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는 세상에서는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 비밀을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시고, 그 뜻을 알도록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성이나 눈과 귀, 마음와 같은 감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은 성령이 없기에 영적인 지혜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받았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리버티 교수중에 한 분인 모스탄이란 분이 한국 교회에 온 후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서울의 은평장로교회에서 집회를 하면서 교회 전체가 usa를 외치며 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고 주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데, 정치적인 이슈로 강단에 서는 것을 볼 때 심히 걱정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바라보는 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방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 때는 대형화를 하면서 많은 불법들이 자행되거나 분열을 하면서 세상의 근심이 된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 교회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치우치며 태극기 부대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통일교 본부에 특검이 들어가 압수 수색을 하니까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흰셔츠를 입고 저항을 했습니다. 그들의 흰 셔츠의 뒷면에는 ‘holy mother, 한’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한학자 여사는 거룩한 어머니로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사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우리는 신령한 자로서 영적인 사람입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와 문화등을 판단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 십자가가 중심이 되는 삶에 대하여 세상은 비이성적이고 어리석게 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판단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세상은 예수님을 알수 없기에 도리어 주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도우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십자가의 진리 보다 철학적 지혜나, 인간 지도자의 권위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이 점점 헬라의 철학적인 지식을 더욱 신뢰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적인 가치로 보려는 성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성령의 역사로 깨달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