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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3) - 함께 가야 할 이유, 십자가의 부르심 (고전 1:10-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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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451회 작성일 25-07-0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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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3) - 함께 가야 할 이유, 십자가의 부르심 (고전 1:10-17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함께 살아가기 보다는, 혼자 살아가기에 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 가정의 해체, 그리고 가상 공간에서의 소통 증가, 스마트폰 사용 증가 등은 개인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현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도 과거에는 ‘WE ARE THE WORLD’ 라는 취지로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자는 정서라면, 이제는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나만 잘 살아보세 라는 분위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승자는 누구인가요?

과거에는 농경 사회로서 가족 중심으로 살아가고, 마을에서도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두레는 농촌에서 서로 일손을 나누며 농사짓던 상호 협력 제도 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은 너의 집 식으로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일을 도와 주곤 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중시하며, 밥을 함께 먹고 정을 나누는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품앗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손이 필요한 사람끼리 서로 번갈아 가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처가가 있는 시골에 가면 김장철이 되면 품앗이로서 서로를 도와서 김장을 담그고 있습니다. 고령으로 대부분이 농사일을 하지 못하지만, 김장이라도 서로를 도와서 만드는 지혜인 것입니다.

만일 마을에서 서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반목하며 다툼이 일어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그동안 정으로 하나되어 협력하던 마을이 인심이 넘치고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그 마을 사람들에게 품어지는 인심으로 감동을 받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툼이 일어나니까 첫 번째 일어나는 상황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사나운 얼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을 회관에 모여 웃음을 나누며 음식을 나누던 사람들이 두패 세패로 나뉘면서 서로를 험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하던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지고, 서로 마음이 맛는 사람끼리 모여 일을 하니 능률도 떨어지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했던 행복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웃음이 없어지니 사랑도 식어집니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점점 병이 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생기가 사라지는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 이 마을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와 상황을 분석해 보니, 유일한 해결책은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합하여 하나가 될 때에 마을이 회복이 되고 생기가 넘치는 마을이 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십년 전인 2015년에 경북 상주 시골 마을회관에서 82세 여성이 이웃 노인 6명에게 농약을 넣은 사이다를 제공해,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독 증세가 나타난 사례가 있었습니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분쟁하며 다툼으로 일어난 결과가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분열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다가오는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쟁으로 인한 결과는 가정이나, 마을, 교회나 국가에나 어디에도 적용됩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도전을 합니다. 그만 싸우고 온전히 연합하여 주님의 영광이 넘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면서 분쟁이 같이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함께 가야 할 이유, 십자가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창조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고 했습니다. 어지러움은 무질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질서와 화평 가운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온 만물은 질서 가운데 하나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라는 것이 결국은 질서 가운데 하나되어 운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 가운데 하나되게 하시지만, 그 화평을 깨고 분쟁을 가져오는 것이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 시켜 깨트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의 관계를 깨트리고 다툼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죄로 인하여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나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야 말로 사람에게 가장 보배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은 그야 말로 동과 서 같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과 식사도 같이 하지 않을 정도로 배척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분열을 화목하게 하시고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나치 강제 수용서 생존자로서 전쟁이 끝난 후에 1947년 독일 뮌헨 지하 교회 집회에서 ‘하나님은 죄를 바다 깊숙이 던지신다’라는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한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남자는 수용소 시절때에 코리와 언니 베치를 모욕하던 경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한 후에 “나를 용서해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코리는 “언니 베치가 수용소에서 죽었는데 어떻게?”라는 분노와 공포로 쉽게 손을 뻗지 못했습니다. 이때 코리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정은 없습니다. 제 의지로 손만 올리니 ‘사랑’은 주님이 채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후에 기계처럼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때 기적과 같이 자신의 어깨와 팔과 손으로 따뜻한 전류같은 감각이 흐르며 ’형제여, 내가 전심으로 용서합니다.”라고 울먹였습니다. 두 사람은 몇 초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코리는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체험했다”고 회고 한 후에, 이후 전 세계 60여 개국을 돌며 ‘용서가 치유를 낳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의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 한 몸이 되게 하심은 온전히 연합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한 몸은 서로 연결되어 피가 혈관을 타고 원활히 흘러야 하고, 인대와 뼈도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혹시 혈관이 막히면 심장 마비나 뇌경색이 찾아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뼈가 골절이 되면 수술을 해서 다시 연결해야, 다시 건강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몸은 서로 연결하여 하나가 될 때에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주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에 교회가 하나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같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십자가의 피가 모든 만물을 하나가 되어 화평케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깨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 인하여 화목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더 나아가 지체들과의 화목을 누리며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분쟁하는 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십자가는 그 분의 희생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자기 희생이며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분열하는 것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며, 주님의 희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십자가의 강한 능력이 빛을 잃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분열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아무런 능력없는 교회로서, 도리어 세상 사람이 걱정해야 하는 교회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서 하나되어야 하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십자가의 본질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분쟁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약 18개월 간 교회를 세운 후에,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에 세속적인 가치가 들어오면서 다양한 리더와 배경을 따라 분열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분열이 있다는 시속을 듣게 됩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그들의 문제는 심각했기에,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분쟁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원인이었습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 1:12). 각자가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 각자가 좋아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에 함께 했던 성도들일 수 있습니다. 아볼로파는 웅변에 능하고 성경에 정통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아볼로의 지적인 가르침에 감동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게바파는 유대인 사도였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 들 중에 게바인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파는 외형상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 보다는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고린도의 지혜와 웅변을 통하여 자신을 자랑하던 문화가 교회에 들어와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강하게 하나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사도 바울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분쟁하지 말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교회가 분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며, 자기 희생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몸이 나뉘이는 것은 큰 고통이 따릅니다. 온 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인하여 몸이 절단되거나, 지진의 여파로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따라오며 평생 휴유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이와같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것은, 우리 주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이고, 온 지체가 고통하는 아픔을 겪는 것입니다.

한 마을의 작은 교회가 예배당 바닥 카펫 색깔을 바꾸려다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러자 카펫 색깔에 대한 의견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50대 50으로 나뉘이자, 결국 교회는 예배당 절반은 파란 카펫, 나머지는 분홍 카펫을 깔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지지한 색깔 구역에만 앉고, 성찬식 때도 파란, 분홍편이 따로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주일마다 서로를 향해 눈치와 수군거림이 이어졌고, 끝내 공동체는 두 패로 나뉘어 졌습니다. 결국 카펫 교체라는 사소한 이슈가 십자가의 은혜를 무력화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소견이 십자가의 은혜를 뛰어넘어 복음의 빛을 잃게 한 것입니다. 분열은 큰 이슈가 아니라, 사소한 감정이나 말다툼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단지 인간 관계의 문제를 넘어,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며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은혜를 주신 예수님의 몸을 하나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은 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는 원리와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2-4).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이 하나이듯이, 우리는 같은 믿음과 주님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켜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됨을 지키는 교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교회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하나됨도 있지만 분열하고자 하는 소욕도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곳이 항상 우리의 마음에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섬기다 보면 크고 작은 일로 인하여 아픔과 상처, 때로는 분열이 찾아오곤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분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지키고자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투다가 분열할까요? 왜 이러한 분열이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길을 선택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중심성과 자기 중심성과 교만에 있습니다. 잠언서는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 18:1)라고 했습니다. 이는 어떠한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 욕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의 삶은 자기 희생과 겸손이 요구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분열이 시작된 큰 사건은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자신을 위한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의 힘으로 로마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때 진리에서 벗어난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님의 편을 떠나 세속의 권력의 편에 서면서 기독교는 참된 교회와 거짓된 카톨릭 교회로 나뉘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도 카톨릭이라는 큰 교회는 거대한 문화 유산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사기에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고 했듯이, 자신이 중심이 되는 순간 공동체에서 나뉘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다 보면 다툼이 생기고 결국 분열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열하는 이유는 불신과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지체나 교회에 대한 불신이 생기려고 한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겨야 합니다. 불신이 생기면 원망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모세를 불신하다가 원망하자, 이스라엘이 나뉘어지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입니다. 지체나 교회에 대한 험담이나 비방 하는 말은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의견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다른 의견이나 생각으로 인하여 분열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나로 인하여 교회가 균형을 이루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믿음으로 더욱 교회와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가도록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세 가지의 원리를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같은 복음을 믿고 선포하며, 같은 진리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며 함께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질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해야 합니다. 마음이 같으면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뜻이 같으면 함께 목표를 향해 걸어갑니다. 즉 마음과 뜻이 합한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향하여 함께 전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뜻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분의 몸인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몸 안에 살아가는 우리를 세우시며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시고 다시 하나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예수님안에서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972년 6월 8일 남베트남의 한 마을이 미국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온 마을이 불에 탔습니다. 이때 한 사진기자가 9세 소녀 판 티 킴 푹이라는 소녀가 맨발로 뛰쳐나오는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이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후 24년이 지난 후, 1996년 11월 11일 워싱턴 DC 베트남전 참전용서 추모비 앞에서 킴 푹은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그날 폭탄을 떨어트린 조종사를 만나게 된다면, 저는 용서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지만, 지금과 미래를 위해 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객석 한쪽에서 이를 듣던 전직 공군 장교 존 플러머 목사가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그는 당시 폭격 작전을 조율한 장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행사 후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무대 앞으로 나와 ’미안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킴 푹은 잠시 후에 숨을 고른 후, 플러머를 끌어안았습니다. 두 사람은 울음을 터뜨리며 오랫동안 서로를 놓지 못했습니다. 플러머는 ’그 포옹으로 내 삶의 전쟁이 끝났다.‘고 회고했습니다.

킴 푹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용서하셨기에 나도 용서할 수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것은, 용서받은 킴 푹이 자신의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평화와 화해의 강연을 함께 다니며 전쟁에서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는 네이팜 불길보다 뜨거운 미움이, 십자가 사랑 앞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변화된 한 사람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는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포옹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 공동체에도 지금 그 힘이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분열을 치유하고 모두가 하나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어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하며, 교회가 세상을 포용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1989년, 팀 켈러 목사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복음의 본질로 초대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은 도시를 통합시키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자신을 비워낼 때, 인종과 계층, 문화가 다른 사람도 하나 될 수 있다.” 맨해튼 안에는 다양한 인종, 계층, 교육 수준, 정치 성향이 공존합니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뒤섞인 도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한 교회 안에서 같은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팀 켈러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모든 사람을 낮추고 동시에 높이는 유일한 해답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복음적 메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리디머 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20~30대 전문직 종사자들, 예술가들, 노숙자, 난민, 이민자들까지도 함께 모이게 되었고, 함께 예배하며 도시 안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리디머 교회는 하나 되기 어려운 도시 한복판에서, 복음은 사람을 낮추고 동시에 사랑으로 끌어안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리디머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자기 중심성의 장벽을 넘어서 십자가 앞에서 함께 무릎 꿇을 때, 참된 하나됨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이유이며 십자가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