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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32) - 참된 안식의 길 (마 1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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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921회 작성일 19-03-3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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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32) - 참된 안식의 길 (마 11:20-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영혼의 안식과 평안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자연에서 찾습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자연에서 명상을 하며 도를 깨달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행에서 찾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각기 생활 방식은 다르게 살아도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영혼의 참된 안식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아들이시며 하나님께로 가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분리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연합은 영혼의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도 유효하며 참된 안식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심판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0).

주님은 갈릴리 지역의 마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신 마을들은 고라신,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입니다.  주님이 이들 마을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주님이 권능을 이들 마을에서 가장 많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권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들 마을을 향하여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22). 

고라신은 갈릴리 북쪽의 언덕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리고, 벳새다도 갈릴리 근처의 마을입니다.  벳세다는 안드레와 빌립, 그리고 베드로의 고향으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권능은 메시야의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전하신 메시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지만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곳에서 행한 권능을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도시로서 무역으로 부를 얻은 해안 도시입니다.  에스겔은 이 도시에 대하여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3).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가버나움은 소돔보다 더욱 강팎하게 하나님을 거부한 도시였습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거주하시면서 사역을 행하셨기에 더 큰 책망을 받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하늘에까지 높아지다가 음부에까지 낮아진 바벨론의 멸망을 빗대신 것이며, 더 나아가 사탄의 교만으로 지옥에 떨어진 심판의 선언을 암시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탄의 교만과 타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사 14:13-15).  음부는 영혼이 고통당하는 지옥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천사였지만,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과 같이 높은 보좌를 탐내려다 불의가 드러나 음부에 떨어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와같이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을 지켜보는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오히려 가버나움에 거주하던 로마의 백부장은 주님을 믿었지만,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버나움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그 후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가 말라 죽었듯이, 한때는 가장 번영하던 가버나움과 고라신, 그리고 벳세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것은 주님의 책망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율법이나 종교가 아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않고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증거하는 메시야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거절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판의 날에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심판으로 가버나움의 도시는 황폐화가 되어 지금은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러 하나님과 분리된 자는 사탄과 함께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참된 안식의 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은 인생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고 초청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영혼은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아담이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처럼 죄의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영혼의 고통과 공허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셔서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워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안식을 주실 것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향하여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아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어린 시절 자신의 죄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에게 있는 죄의 짐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구원의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뭔가 느껴야 돼!  뭔가 해야 한다고!  그는 등에 채찍질을 당하거나 몹시 어려운 순례를 떠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고뇌로 인하여 사람으로 지음을 받기 보다는 차라리 개구리나 두꺼비로 지음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부정한 짐승이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라고 고민했지만 아무도 자신에게 그 답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눈보라가 쳐서 자신의 교회로 가지 못하고 길가에 있던 조그만 감리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설교자가 주님을 바라보라는 설교를 듣게 됩니다.  바로 이사야의 말씀이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2).  그때 스펄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바라보아라, 나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있다.  나는 죽었고 장사되었다고 다시 살아났다. 나를 바라보아라, 나는 승천했다.” 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때 스펄전은 자신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저는 절망에서 건짐을 받았고, 너무나 놀라운 마음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집에 돌아온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 놀라운 일이 있었구나!  그날 우리 집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가족이 구주를 만나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자신의 간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펄전이 예수님이 만나 죄의 무거운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영적인 원리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영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후에 복을 주셨는데, 이는 피조물의 으뜸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 (사 59:2).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빈 공간을 하나님 외의 것으로 채우려고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려움과 수치심이 찾아왔고, 가인에게는 질투심이 찾아온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아닌 죄의 속성이 자리잡게 되었고, 결국 사람은 종교를 만들거나 자신들의 성취로 하나님의 빈 공간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조상들은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었고 사람을 죽이는 기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크게 할 수록 죄는 점점 관영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며 우리의 빈 공간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었던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되어 예배하게 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찾아온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사는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참된 평안을 주님께 나아감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해졌기에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멍에를 매고 쉼을 얻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회복한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만, 우리의 육신은 아직 이 세상의 죄와 불의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거운 재정적인 짐을 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려면 재정의 필요를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땀을 흘려도 그 필요를 채우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그 결과로 육체의 질병이 찾아와 치료를 받거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가 큰 고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10대에는 입시의 짐을 지고, 20대에는 취업의 짐을, 30대에는 결혼과 자녀의 짐을 지며, 40대에는 재정적인 짐을 집니다.  50대 부터는 노후의 짐을 집니다.  60대에는 은퇴의 짐을 지며 재정적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70대가 지나면서 외로움이 찾아오고 몸이 노후되면서 더 큰 고통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인생 자체가 연속적인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무거운 짐에서 쉼을 얻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멍에를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멍에란 소가 쟁기를 끌기 위하여 두 마리의 소가 어깨에 메는 도구입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가 매어 일하기에 한결 일하기가 수월합니다.  소가 밭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멍에를 매어야 하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멍에를 매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멍에는 스스로 살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즉, 나의 인생을 내 힘으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할 뿐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를 아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제 천지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2:28-29).  우리가 자신의 멍에를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연합된 삶을 통하여 그 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된 삶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삶은 생명되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거듭나 자의 삶은 생명되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배우며 순종하는 삶이 됩니다.  그리하면, 주님이 우리의 짐을 지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매고 그 분의 인도하심대로 따르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쉬운 멍에를 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어야 할 주님의 멍에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이기에 믿음의 사람에게는 가장 가벼운 멍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지게 하는 멍에는 율법과 종교, 그리고 자신의 의입니다.  이는 무거운 멍에로서 결국 좌절하며 실패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신뢰하며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순종의 이유입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참된 안식은 믿음의 순종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히 4:3).  우리가 참된 안식을 누리는 비결은 주님께 나아가 그 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는 비결은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온전한 연합을 이루었기에 그 분을 따르는 삶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