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14) - 주님의 영광이 되는 코이노니아를 위하여(고전 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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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26회 작성일 25-12-14 00:19본문
고린도전서(14) - 주님의 영광이 되는 코이노니아를 위하여(고전 10: 14-33)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축복중의 하나는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를 우리는 보통 교제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성경적인 코이노니아는 단지 친목 위주의 모임이 아니라, 교제 이상으로 참여하고 함께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코이노니아는 공통의 것을 함께 누리는 관계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지체들이 함께 나누며 참여함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주님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갈 때입니다.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주님의 코이노니아는 성령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역사하셔서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세워가야 할 성경적인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코이노니아를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은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학생 시절에 함께 교회에서 찬양하며 예배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믿음의 지체들로 인하여 아름다운 추억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었습니다. 그들과 교회의 일에 참여하기도 했고, 어려운 지체가 있으면 위로와 격려를 하며 함께 믿음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게 교회의 기쁨이 있게 하는 힘은 바로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서울로 애경사에 챙기러 가거나, 병문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승합차에서 오고 가는 여정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웃음과 행복을 주며 모두에게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게 했습니다.
선교 여행을 가면 오고 가는 시간들과 선교지에서의 사역의 시간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사역의 코이노니아를 성령이 역사하시고 모두의 마음에 큰 행복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환경도 열악한 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주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기에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기에 큰 기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호남 친교회가 광주 반석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전주에서 사역하시는 팔라모 멕시코 선교사님이 처음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선교사로 오셔서 현재는 전주에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혼자 외롭게 사역하시다가 친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시간, 그리고 사역을 나누며 본인의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교회 후에 전화를 걸어서 어떠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나 힘을 얻고 마음의 회복과 부흥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진 사역자로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사랑으로 교제하는 시간들이 마음에는 벌써 회복과 부흥의 은혜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믿음의 코이노니아를 축복하시고 성령님의 크신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를 의미할 때에 다음의 4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필요를 함께 나누는 것이 코이노니아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이방인 교회들에게 구제 헌금을 모아 전달한 것을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지체들을 돌아보는 것이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둘째는 주 안에서 믿음의 교제입니다. 요한일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코이노니아) 하게 하심이라”(요일 1:3)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교통하는 것을 헬라어로 성령님과 코이노니아 한다고 했습니다 (고후 13:13).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지체들과 연합하여 말씀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셋째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주의 만찬으로 교회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힘을 합치는 동역자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돌아보며,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주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누구와 가장 마음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의 쾌락과 향략을 중심으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니다. 그들의 교제의 중심에는 세상의 가치와 철학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생각과 삶을 이끌어 갑니다. 오늘날 달리기 크루 같은 코이노니아는 달리기를 목적으로 모여 그 안에서 교제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나 마귀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믿는 자들을 제외하면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잡은 마귀의 코이노니아의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코이노니아를 대비하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코이노니아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코이노니아와 귀신, 즉 마귀와의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닌 그릿도의 코이노니아 안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희생을 통하여 얻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 안에서 주의 만찬에 참여합니다. 주의 만찬에서 나누는 피는 우리의 구원을 얻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더 나아가 주의 만찬에서의 떡은 하나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에서 하나되는 코이노니아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음식을 먹는 것이 제단에 참예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고전 10:18).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화목제를 드린 후에 남은 고기를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예배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합하여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와 같이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진설병의 떡을 성소에서 함께 먹었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인 공동체의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함께 어려운 자를 돌아보거나 기도회에 참여하고, 은사별로의 다양한 사역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쁨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2.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종교 혼합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0-21).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강하게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 하는 우상 숭배의 잔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고린도의 신전 연회에 있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제사를 드린 후에 그 고기를 신전 마당이나 연회장 같은 곳에 함께 먹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문화 속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우상은 실체가 없다. 그러니 고기는 그냥 고기다.”
양심이 약한 성도는 “그 자리에 가면 우상숭배로 끌려가는 느낌이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자가 실족하면 그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0장에서는 ‘신전 제사 후에 신전에서의 연회’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전에서의 식사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고기를 먹는 것이 예배의 한 형태이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모습이라고 먼저 강조했습니다. 이와같이 신전에서 드리는 제사 자체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영적인 배경에는 귀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사 후에 먹는 상과 잔도 우상 숭배 의식의 한 형태로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주의 성도는 우상 숭배의 장소에서 참여하는 귀신의 잔과 귀신의 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1).
우상은 신이 아니지만, 그 제사의 배후에는 귀신과 같은 악한 영적 세력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잔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참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제가 아는 한 성도가 등산을 무척 좋아해서 산악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 분이 산악회에서 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사회를 보며 참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사를 드리고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는 것도 우상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브올에서 바알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했을 때에 염병으로 크게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 그 날에 이만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모압 여인에게 미혹되어 그들의 신을 숭배하고 음식을 먹고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바알 숭배자들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었기에 하나님의 큰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거룩을 무시하고 혼합주의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나 통합을 주장하는 자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혼합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통일교도 최근에 사회에서 정치적인 이슈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혼합주의입니다. 그들은 문선명을 재림 예수로, 한학자를 독생녀로 높여 숭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건물에는 예수님과 석가모니 상을 만들어 종교 통합을 시도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종교통합하려는 운동을 하는 것도 복음이 없는 종교 단체와의 연합이 바로 종교 혼합주의인 것입니다. 귀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어떠한 연합을 시도하는 자체가 귀신의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기독교 단체에서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그들의 예배 분위기에서 카톨릭의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온전한 복음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영적 분위기를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과거에는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 통합을 시도하는 혼합주의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찾아오는 혼합주의의 유혹은 평화광장에 유행하는 사주팔자, 손금 등과 같은 일에 장난으로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귀신의 코이노니아에 이르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3.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의 코이노니아가 세상의 코이노니아와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지체들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도 세상과 다음의 모습에서 차별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자유안에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성도를 세우고 교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신전에서의 식사는 금하지만,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의 고기는 종교 의식에서 벗어난 그냥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 중 누군가 청하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자유를 가지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음식이 제물이라고 한다면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기가 영적으로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고기가 우상 숭배에 사용한 것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제물이라고 말한 사람은 성도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종교적 의미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그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때 누군가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양심 때문에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요? 왜 우리가 감사하며 먹는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아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그들의 변론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의 기준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 들로 다른 사람이 실족하여 넘어진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결국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격려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더럽고 부패한 것에서 벗어나 순결한 하나님의 진리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주 안에서 성숙함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코이노니아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자이므로, 우상과의 참여를 단호히 끊고, 자유조차도 덕과 양심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축복중의 하나는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를 우리는 보통 교제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성경적인 코이노니아는 단지 친목 위주의 모임이 아니라, 교제 이상으로 참여하고 함께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코이노니아는 공통의 것을 함께 누리는 관계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지체들이 함께 나누며 참여함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주님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갈 때입니다.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주님의 코이노니아는 성령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역사하셔서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세워가야 할 성경적인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코이노니아를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은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학생 시절에 함께 교회에서 찬양하며 예배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믿음의 지체들로 인하여 아름다운 추억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었습니다. 그들과 교회의 일에 참여하기도 했고, 어려운 지체가 있으면 위로와 격려를 하며 함께 믿음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게 교회의 기쁨이 있게 하는 힘은 바로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서울로 애경사에 챙기러 가거나, 병문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승합차에서 오고 가는 여정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웃음과 행복을 주며 모두에게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게 했습니다.
선교 여행을 가면 오고 가는 시간들과 선교지에서의 사역의 시간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사역의 코이노니아를 성령이 역사하시고 모두의 마음에 큰 행복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환경도 열악한 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주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기에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기에 큰 기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호남 친교회가 광주 반석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전주에서 사역하시는 팔라모 멕시코 선교사님이 처음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선교사로 오셔서 현재는 전주에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혼자 외롭게 사역하시다가 친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시간, 그리고 사역을 나누며 본인의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교회 후에 전화를 걸어서 어떠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나 힘을 얻고 마음의 회복과 부흥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진 사역자로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사랑으로 교제하는 시간들이 마음에는 벌써 회복과 부흥의 은혜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믿음의 코이노니아를 축복하시고 성령님의 크신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를 의미할 때에 다음의 4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필요를 함께 나누는 것이 코이노니아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이방인 교회들에게 구제 헌금을 모아 전달한 것을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지체들을 돌아보는 것이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둘째는 주 안에서 믿음의 교제입니다. 요한일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코이노니아) 하게 하심이라”(요일 1:3)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교통하는 것을 헬라어로 성령님과 코이노니아 한다고 했습니다 (고후 13:13).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지체들과 연합하여 말씀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셋째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주의 만찬으로 교회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힘을 합치는 동역자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돌아보며,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주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누구와 가장 마음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의 쾌락과 향략을 중심으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니다. 그들의 교제의 중심에는 세상의 가치와 철학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생각과 삶을 이끌어 갑니다. 오늘날 달리기 크루 같은 코이노니아는 달리기를 목적으로 모여 그 안에서 교제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나 마귀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믿는 자들을 제외하면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잡은 마귀의 코이노니아의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코이노니아를 대비하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코이노니아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코이노니아와 귀신, 즉 마귀와의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닌 그릿도의 코이노니아 안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희생을 통하여 얻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 안에서 주의 만찬에 참여합니다. 주의 만찬에서 나누는 피는 우리의 구원을 얻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더 나아가 주의 만찬에서의 떡은 하나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에서 하나되는 코이노니아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음식을 먹는 것이 제단에 참예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고전 10:18).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화목제를 드린 후에 남은 고기를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예배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합하여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와 같이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진설병의 떡을 성소에서 함께 먹었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인 공동체의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함께 어려운 자를 돌아보거나 기도회에 참여하고, 은사별로의 다양한 사역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쁨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2.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종교 혼합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0-21).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강하게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 하는 우상 숭배의 잔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고린도의 신전 연회에 있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제사를 드린 후에 그 고기를 신전 마당이나 연회장 같은 곳에 함께 먹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문화 속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우상은 실체가 없다. 그러니 고기는 그냥 고기다.”
양심이 약한 성도는 “그 자리에 가면 우상숭배로 끌려가는 느낌이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자가 실족하면 그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0장에서는 ‘신전 제사 후에 신전에서의 연회’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전에서의 식사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고기를 먹는 것이 예배의 한 형태이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모습이라고 먼저 강조했습니다. 이와같이 신전에서 드리는 제사 자체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영적인 배경에는 귀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사 후에 먹는 상과 잔도 우상 숭배 의식의 한 형태로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주의 성도는 우상 숭배의 장소에서 참여하는 귀신의 잔과 귀신의 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1).
우상은 신이 아니지만, 그 제사의 배후에는 귀신과 같은 악한 영적 세력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잔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참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제가 아는 한 성도가 등산을 무척 좋아해서 산악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 분이 산악회에서 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사회를 보며 참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사를 드리고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는 것도 우상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브올에서 바알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했을 때에 염병으로 크게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 그 날에 이만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모압 여인에게 미혹되어 그들의 신을 숭배하고 음식을 먹고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바알 숭배자들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었기에 하나님의 큰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거룩을 무시하고 혼합주의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나 통합을 주장하는 자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혼합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통일교도 최근에 사회에서 정치적인 이슈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혼합주의입니다. 그들은 문선명을 재림 예수로, 한학자를 독생녀로 높여 숭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건물에는 예수님과 석가모니 상을 만들어 종교 통합을 시도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종교통합하려는 운동을 하는 것도 복음이 없는 종교 단체와의 연합이 바로 종교 혼합주의인 것입니다. 귀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어떠한 연합을 시도하는 자체가 귀신의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기독교 단체에서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그들의 예배 분위기에서 카톨릭의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온전한 복음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영적 분위기를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과거에는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 통합을 시도하는 혼합주의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찾아오는 혼합주의의 유혹은 평화광장에 유행하는 사주팔자, 손금 등과 같은 일에 장난으로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귀신의 코이노니아에 이르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3.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의 코이노니아가 세상의 코이노니아와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지체들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도 세상과 다음의 모습에서 차별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자유안에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성도를 세우고 교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신전에서의 식사는 금하지만,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의 고기는 종교 의식에서 벗어난 그냥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 중 누군가 청하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자유를 가지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음식이 제물이라고 한다면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기가 영적으로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고기가 우상 숭배에 사용한 것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제물이라고 말한 사람은 성도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종교적 의미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그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때 누군가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양심 때문에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요? 왜 우리가 감사하며 먹는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아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그들의 변론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의 기준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 들로 다른 사람이 실족하여 넘어진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결국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격려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더럽고 부패한 것에서 벗어나 순결한 하나님의 진리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주 안에서 성숙함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코이노니아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자이므로, 우상과의 참여를 단호히 끊고, 자유조차도 덕과 양심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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