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4) 십자가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 (고전 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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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25-07-12 21:12본문
십자가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 (고전 1:18-3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1920년대 시카고 출신 엔지니어 조지프 스트라우스가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저 거친 골든게이트 해협 위에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를 놓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폭풍과 안개가 몰아치는데 무슨 다리?” “바다 깊이가 100 m가 넘고, 조류도 거센데 터무니없어!” “2.7 m 다리를 어떻게 건설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을 조롱하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는 비전을 보았기에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이미 400개의 다리를 지어본 경험을 가지고 더 큰 다리도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구조 공학자인 찰스 엘리스와 함께 강풍. 지진, 조류를 견딜 수 있는 수치를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속에 사람들이 어려워할 때에, 이 다리를 건설함으로 일자리가 창출되고 다리를 설치하는 비용은 통행료로 갚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신문과 라디오 연설을 하며 ‘교량 없는 도시는 엘리베이터 없는 마천루’라고 호소하며 금문교 다리를 건설하는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33년 공사가 시작됐고, 4년 뒤인 1937년에 다리를 완공 한 후에 개통했습니다. 그 날에 18만 명이 다리 위를 걸었고, 지금은 하루에 10만 대 차량이 매일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문교는 세계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금문교의 비전을 나눌 때에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미련한 공사로 보였지만, 지금은 금문교가 샌프란시스코의 도시를 살리는 대표적인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해협을 건너게 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은혜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라 부르던 금문교가 도시의 생명선이 된 것처럼, 사람들이 미련하다던 십자가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금문교가 샌프란시스코를 살린 다리라면,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살린 다리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미련하다 말하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봅니다. 왜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존 번연은 17세기를 살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는 스스로 ‘거리의 가장 심한 욕쟁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욕설과 도박, 오락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읽어준 경건 서적을 듣고, 처음으로 거룩과 심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세 명의 여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대화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했고, 혹시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으며 복음을 알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 ‘네 의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말씀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며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퍼도 감옥에 12년간 투옥되었지만, 그 곳에서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고, 그는 회심한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 라는 말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하다고 여깁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십자가는 흉악범이 죽는 사형틀이었기에, 십자가의 복음이고 할 때에 더욱 어처구니 없게 여겼을 것입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지만, 사도 바울 시대의 십자가는 흉악범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던 사형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우리의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못 박히시며,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소식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의 의미는 현재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멸망의 진행 상태에 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들을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 사망은 그들의 영혼을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인 지옥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고전 15:55-56)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죄를 통해서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이와같이 어둠에서 멸망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는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게 여기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0). 왜 십자가의 메시지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가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신 곳입니다. 즉 율법이 요구한 죄의 형벌인 사망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되셔서 죄인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주님안에 있는 죄는 정죄받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강한 능력은 어두운 세력의 주관자인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 시키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의 죄와 세속적인 문화를 이기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아담으로서 우리는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19-20).
고린도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상업과 관광, 그리고 학문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지혜를 숭배하는 수준까지 도시에서는 지식인들을 귀하게 대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로 인하여 세상적인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지도자를 따라 자신의 당을 만들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던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기적을 요구하며 표적을 구했고, 헬라 신자는 지혜를 추구함으로 교회의 본질인 복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은 사람들의 지혜나 말을 잘하는 수사에 잇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음을 강하게 어필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19-20).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변사들은 논리적인 말로 복음을 업신여기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따르도록 유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이 있어야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헬라의 신자들은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나 쉽다고 여겼기에, 더 논리적인 지식을 요구하며 복음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가 진정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은 세상 지혜로 영혼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변사들을 불러서 세상적인 지혜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하는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의 한계를 극복하여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되고 육신적인 교회가 된 이유는 본질인 십자가의 중심에서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움직이는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 지식이나 철학, 인간의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기 자신의 스승을 두면서 분열하였고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서 떠날 때에 사람들은 육적인 삶을 살아가며 세상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길은 다시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인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받은 능력이 사람의 지혜나 기적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단순하기에, 사람들은 복음을 넘어 표적을 구하고 지식을 추구하며 복음에 더 많은 것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가 되시며 거룩이 되시며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린도 교회처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분열과 상처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 자랑과 교만과 당파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 거하고 그 본질을 지킨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의 생명을 얻으며, 거룩한 지혜로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고린도는 로마 식민 도시로서 무역을 통해서 발전하는 신흥 도시였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철학자들을 고용해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고, 부자 상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연회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노예 출신도 많았고 자유인과 하층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받고 들어오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대부분 육체를 따라 지혜가 많지 아니하고, 능력도 많지 않고 문벌도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이 노예 출신이거나 하층민, 또는 평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부 부유한 상인이나 상류층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사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을 지혜롭게 하심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하게 하심으로 세상에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내리신다고 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미련해 보인 홍수와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순종하는 노아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 지혜로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련한 것을 택하사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전도는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며 하나님을 매주 예배드리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 돈으로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왜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리냐고 합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도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미련한 것들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는 미디안의 대군 앞에 약해 보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약한 존재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 앞에 약한 존재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서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약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약하고 멸시를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2-3).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약했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분의 약함과 멸시로 가장 지혜롭고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헤롯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를 기억은 하지만 과거의 인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그 분을 온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분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시받는 창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으로 우상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습니다. 여리고에서 가장 하층민으로 살았던 라합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가장 천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재산과 남편을 잃고 홀로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에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룻이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룻을 높이셔서 다윗의 증조모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택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에 대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세나 부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약하고 천하고 미련할 때에 부르셔서 복을 주셔서 높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의 권세를 가지고 교회 내에 파벌을 만드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의 만찬을 할 때에 부자나 권세자들은 일찍 교회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취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일을 마치고 교회에 온 가난한 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마실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책망하며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바 자랑하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림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우리의 자랑이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모든 분쟁이 사라지고, 교회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더욱 힘차게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1920년대 시카고 출신 엔지니어 조지프 스트라우스가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저 거친 골든게이트 해협 위에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를 놓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폭풍과 안개가 몰아치는데 무슨 다리?” “바다 깊이가 100 m가 넘고, 조류도 거센데 터무니없어!” “2.7 m 다리를 어떻게 건설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을 조롱하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는 비전을 보았기에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이미 400개의 다리를 지어본 경험을 가지고 더 큰 다리도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구조 공학자인 찰스 엘리스와 함께 강풍. 지진, 조류를 견딜 수 있는 수치를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속에 사람들이 어려워할 때에, 이 다리를 건설함으로 일자리가 창출되고 다리를 설치하는 비용은 통행료로 갚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신문과 라디오 연설을 하며 ‘교량 없는 도시는 엘리베이터 없는 마천루’라고 호소하며 금문교 다리를 건설하는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33년 공사가 시작됐고, 4년 뒤인 1937년에 다리를 완공 한 후에 개통했습니다. 그 날에 18만 명이 다리 위를 걸었고, 지금은 하루에 10만 대 차량이 매일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문교는 세계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금문교의 비전을 나눌 때에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미련한 공사로 보였지만, 지금은 금문교가 샌프란시스코의 도시를 살리는 대표적인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해협을 건너게 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은혜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라 부르던 금문교가 도시의 생명선이 된 것처럼, 사람들이 미련하다던 십자가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금문교가 샌프란시스코를 살린 다리라면,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살린 다리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미련하다 말하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봅니다. 왜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존 번연은 17세기를 살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는 스스로 ‘거리의 가장 심한 욕쟁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욕설과 도박, 오락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읽어준 경건 서적을 듣고, 처음으로 거룩과 심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세 명의 여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대화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했고, 혹시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으며 복음을 알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 ‘네 의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말씀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며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퍼도 감옥에 12년간 투옥되었지만, 그 곳에서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고, 그는 회심한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 라는 말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하다고 여깁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십자가는 흉악범이 죽는 사형틀이었기에, 십자가의 복음이고 할 때에 더욱 어처구니 없게 여겼을 것입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지만, 사도 바울 시대의 십자가는 흉악범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던 사형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우리의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못 박히시며,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소식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의 의미는 현재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멸망의 진행 상태에 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들을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 사망은 그들의 영혼을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인 지옥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고전 15:55-56)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죄를 통해서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이와같이 어둠에서 멸망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는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게 여기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0). 왜 십자가의 메시지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가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신 곳입니다. 즉 율법이 요구한 죄의 형벌인 사망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되셔서 죄인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주님안에 있는 죄는 정죄받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강한 능력은 어두운 세력의 주관자인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 시키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의 죄와 세속적인 문화를 이기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아담으로서 우리는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19-20).
고린도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상업과 관광, 그리고 학문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지혜를 숭배하는 수준까지 도시에서는 지식인들을 귀하게 대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로 인하여 세상적인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지도자를 따라 자신의 당을 만들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던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기적을 요구하며 표적을 구했고, 헬라 신자는 지혜를 추구함으로 교회의 본질인 복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은 사람들의 지혜나 말을 잘하는 수사에 잇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음을 강하게 어필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19-20).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변사들은 논리적인 말로 복음을 업신여기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따르도록 유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이 있어야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헬라의 신자들은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나 쉽다고 여겼기에, 더 논리적인 지식을 요구하며 복음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가 진정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은 세상 지혜로 영혼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변사들을 불러서 세상적인 지혜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하는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의 한계를 극복하여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되고 육신적인 교회가 된 이유는 본질인 십자가의 중심에서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움직이는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 지식이나 철학, 인간의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기 자신의 스승을 두면서 분열하였고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서 떠날 때에 사람들은 육적인 삶을 살아가며 세상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길은 다시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인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받은 능력이 사람의 지혜나 기적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단순하기에, 사람들은 복음을 넘어 표적을 구하고 지식을 추구하며 복음에 더 많은 것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가 되시며 거룩이 되시며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린도 교회처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분열과 상처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 자랑과 교만과 당파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 거하고 그 본질을 지킨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의 생명을 얻으며, 거룩한 지혜로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복음은 믿는 자를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고린도는 로마 식민 도시로서 무역을 통해서 발전하는 신흥 도시였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철학자들을 고용해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고, 부자 상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연회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노예 출신도 많았고 자유인과 하층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받고 들어오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대부분 육체를 따라 지혜가 많지 아니하고, 능력도 많지 않고 문벌도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이 노예 출신이거나 하층민, 또는 평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부 부유한 상인이나 상류층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사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을 지혜롭게 하심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하게 하심으로 세상에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내리신다고 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미련해 보인 홍수와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순종하는 노아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 지혜로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련한 것을 택하사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전도는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며 하나님을 매주 예배드리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 돈으로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왜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리냐고 합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도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미련한 것들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는 미디안의 대군 앞에 약해 보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약한 존재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 앞에 약한 존재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서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약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약하고 멸시를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2-3).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약했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분의 약함과 멸시로 가장 지혜롭고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헤롯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를 기억은 하지만 과거의 인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그 분을 온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분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시받는 창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으로 우상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습니다. 여리고에서 가장 하층민으로 살았던 라합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가장 천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재산과 남편을 잃고 홀로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에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룻이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룻을 높이셔서 다윗의 증조모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택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에 대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세나 부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약하고 천하고 미련할 때에 부르셔서 복을 주셔서 높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의 권세를 가지고 교회 내에 파벌을 만드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의 만찬을 할 때에 부자나 권세자들은 일찍 교회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취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일을 마치고 교회에 온 가난한 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마실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책망하며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바 자랑하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림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우리의 자랑이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모든 분쟁이 사라지고, 교회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더욱 힘차게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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