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 구주 오셨네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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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046회 작성일 22-12-24 15:44본문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마 1:18-25).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 21).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의 나심은 온 인류의 기쁜 소식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모든 피조물의 갈망이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정치적인 경쟁자로 간주하여 2세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라는 포악한 명령을 내립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가 난다는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구약의 성경을 가르쳤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고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 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가 나심을 깨닫고 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성껏 준비한 보배를 가지고 경배를 드립니다. 고대 시대에는 왕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황금은 가장 소중한 예물로서 왕께 드리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유향은 성전 제사나 헌물로 사용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방부제로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비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임을 인정하며 초고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의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의 기쁨이며,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지를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인생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님의 생물학적 유전과 환경적인 요소, 그리고 세상의 가치와 문화 속에서 영향을 미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인생 철학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무척이나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부분은 생존이 아니라 의미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고,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 삶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부터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인생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자연에서 왔다면 그 자연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즉,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해답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흘러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가고, 흙은 물이 되고, 물은 공기가 되어 우주로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로서 결과이지만 흡족하지 못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의 의미를 쾌락에 두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최고의 선은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통하여 얻는 만족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공존하면서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가치이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나의 존재는 무의미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쓰임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인생의 존재 의미를 발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도 바울의 삶의 의미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으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의미를 보여 주셨습니다. 허무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생의 의미를 주님 안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 ...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78-79).
누가복음은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라고 표현합니다.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상황은 헤롯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아무 죄가 없는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일 정도로 참담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유대 사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수탈과 억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의 근원을 로마의 억압이라고 생각한 열성당원은 칼로 로마군을 살해하는 일들을 하면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인류의 모습에서 큰 절망을 보게 됩니다. 우크리아나 전쟁에서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과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외에서 난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고국에 남아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올해 강추위에 난방이 되지 않는 집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일어나는 지진이나 산불 또는 자연 재해로 인하여 인한 피해로 인하여 절망감을 갖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갑자기 찾아온 암이나 중증 질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목전에 두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경제적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세우려 했지만 현실에서는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결국 인생에서 결론은 사망에 이르고, 사망에 이르기 전에 감당해야 하는 질병의 고통도 너무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과 같은 절망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고통하는 자에게 해가 비취듯이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빛이 필요하듯이, 절망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을 주시나요? 주님이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시거나, 질병을 고치시거나 육신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는 지상 낙원을 공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절망적인 것만을 보게 함으로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거짓에서 벗어나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진리대로 살게 하셔서 인생의 거짓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인생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가난에서 절망하게 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말씀과 천국의 소망으로 인하여 마음의 풍성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며 슬퍼할지라도,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좋은 것으로 공급하시며 기쁨의 이유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주신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할때에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떠한 거친 환경도 이기게 하며, 내면의 절망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능력이며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면 세상이 주는 근심과 염려를 극복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의 사망에 대한 해답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문제는 사망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에게는 사망이라는 절망의 순간을 만난게 됩니다. 어찌보면 인생의 결론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은 사망의 종착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망의 이유가 죄라고 지적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 (롬 6:23). 죄의 결과는 사망인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유는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찾아오는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사망에는 첫째 사망이 있고, 그 후에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사망 이후에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진노의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그의 내용에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 죄인들이여! 여러분이 처해 있는 무서운 위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는 곳은 진노하는 큰 용광로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며, 진노의 불로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많은 사람에게 타오르듯이 지금 여러분에 대해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느다란 실에 배달려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타오르면서 매순간 그 실을 태워 당장 끊어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중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여러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진노의 불길을 피할 곳도 전혀 없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순간만이라도 여러분을 붙잡도록 할만한 것(의로운 삶)을 한 적도 없었고, 할 수도 없습니다.(인간의 공로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설교가 진행되면서 역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강단에 올라간 에드워즈는 평소에 하던 대로 종이 위에 기록한 설교문을 토시 하나도 빼먹지 않고 또박 또박 읽었다. 그 때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구원을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 나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이를 시작으로 이곳 저곳에서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여 설교를 그만해 달라고 요구하는 청중들도 있었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양 손으로 의자를 붙잡고 벌벌 떠는 있는 청중들도 있었다. 그곳에 참여했던 사람이 남긴 노트에는 “공포로 인한 굉음(轟音)과 탄식이 귀청을 찢는 듯이 어마하게 컸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말씀에 의해 죄성을 고발 받은 청중들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 바로 자신들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에드워즈는 준비한 설교를 다 끝내지 못했다. 그대신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회개로 초대했다.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이여, 이제 일어나 당신들에게 임할 진노로부터 도망치십시오. … 당신이 있는 소돔으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에드워즈의 권면을 받은 성도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음과 뉘우침을 들으사 구원의 은혜를 흘리셨던 것이다.”
인생에서 만나는 사망은 죄로 인한 저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영생을 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해결해 주심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입니다. 예수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죄의 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며, 영생의 생명은 부활의 생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을 이기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0:25-26).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그 분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같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 10:27) 라고 고백이 복이 되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입술은 복이 있는 자이며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인생의 미래에 대한 해답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 14:1-2).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경제와 정치, 건강에 관하여 아무도 장담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스스로 인생의 죽음 너머의 영원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생의 미래와 영원에 대한 완전한 보증이 되셔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며, 그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토록 있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오시기 위하여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1-14). 주님께서는 충신이시며 진실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분이 백마를 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천국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2). 성령께서 사도 요한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뜨거운 지옥불이 아니라,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일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 용서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특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고,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왕중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보장과 확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천사의 찬양과 같이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기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경배하며 그 분의 이름을 더욱 찬양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 21).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의 나심은 온 인류의 기쁜 소식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모든 피조물의 갈망이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정치적인 경쟁자로 간주하여 2세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라는 포악한 명령을 내립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가 난다는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구약의 성경을 가르쳤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고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 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가 나심을 깨닫고 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성껏 준비한 보배를 가지고 경배를 드립니다. 고대 시대에는 왕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황금은 가장 소중한 예물로서 왕께 드리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유향은 성전 제사나 헌물로 사용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방부제로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비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임을 인정하며 초고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의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의 기쁨이며,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지를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인생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님의 생물학적 유전과 환경적인 요소, 그리고 세상의 가치와 문화 속에서 영향을 미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인생 철학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무척이나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부분은 생존이 아니라 의미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고,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 삶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부터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인생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자연에서 왔다면 그 자연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즉,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해답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흘러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가고, 흙은 물이 되고, 물은 공기가 되어 우주로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로서 결과이지만 흡족하지 못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의 의미를 쾌락에 두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최고의 선은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통하여 얻는 만족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공존하면서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가치이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나의 존재는 무의미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쓰임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인생의 존재 의미를 발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도 바울의 삶의 의미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으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의미를 보여 주셨습니다. 허무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생의 의미를 주님 안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 ...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78-79).
누가복음은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라고 표현합니다.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상황은 헤롯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아무 죄가 없는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일 정도로 참담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유대 사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수탈과 억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의 근원을 로마의 억압이라고 생각한 열성당원은 칼로 로마군을 살해하는 일들을 하면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인류의 모습에서 큰 절망을 보게 됩니다. 우크리아나 전쟁에서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과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외에서 난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고국에 남아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올해 강추위에 난방이 되지 않는 집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일어나는 지진이나 산불 또는 자연 재해로 인하여 인한 피해로 인하여 절망감을 갖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갑자기 찾아온 암이나 중증 질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목전에 두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경제적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세우려 했지만 현실에서는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결국 인생에서 결론은 사망에 이르고, 사망에 이르기 전에 감당해야 하는 질병의 고통도 너무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과 같은 절망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고통하는 자에게 해가 비취듯이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두움에 빛이 필요하듯이, 절망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을 주시나요? 주님이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시거나, 질병을 고치시거나 육신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는 지상 낙원을 공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절망에 대한 해답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절망적인 것만을 보게 함으로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거짓에서 벗어나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진리대로 살게 하셔서 인생의 거짓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인생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가난에서 절망하게 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말씀과 천국의 소망으로 인하여 마음의 풍성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며 슬퍼할지라도,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좋은 것으로 공급하시며 기쁨의 이유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주신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할때에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떠한 거친 환경도 이기게 하며, 내면의 절망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능력이며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면 세상이 주는 근심과 염려를 극복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의 사망에 대한 해답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문제는 사망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에게는 사망이라는 절망의 순간을 만난게 됩니다. 어찌보면 인생의 결론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은 사망의 종착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망의 이유가 죄라고 지적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 (롬 6:23). 죄의 결과는 사망인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유는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찾아오는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사망에는 첫째 사망이 있고, 그 후에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사망 이후에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진노의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그의 내용에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 죄인들이여! 여러분이 처해 있는 무서운 위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는 곳은 진노하는 큰 용광로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며, 진노의 불로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많은 사람에게 타오르듯이 지금 여러분에 대해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느다란 실에 배달려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타오르면서 매순간 그 실을 태워 당장 끊어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중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여러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진노의 불길을 피할 곳도 전혀 없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순간만이라도 여러분을 붙잡도록 할만한 것(의로운 삶)을 한 적도 없었고, 할 수도 없습니다.(인간의 공로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설교가 진행되면서 역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강단에 올라간 에드워즈는 평소에 하던 대로 종이 위에 기록한 설교문을 토시 하나도 빼먹지 않고 또박 또박 읽었다. 그 때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구원을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 나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이를 시작으로 이곳 저곳에서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여 설교를 그만해 달라고 요구하는 청중들도 있었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양 손으로 의자를 붙잡고 벌벌 떠는 있는 청중들도 있었다. 그곳에 참여했던 사람이 남긴 노트에는 “공포로 인한 굉음(轟音)과 탄식이 귀청을 찢는 듯이 어마하게 컸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말씀에 의해 죄성을 고발 받은 청중들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 바로 자신들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에드워즈는 준비한 설교를 다 끝내지 못했다. 그대신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회개로 초대했다.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이여, 이제 일어나 당신들에게 임할 진노로부터 도망치십시오. … 당신이 있는 소돔으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에드워즈의 권면을 받은 성도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음과 뉘우침을 들으사 구원의 은혜를 흘리셨던 것이다.”
인생에서 만나는 사망은 죄로 인한 저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영생을 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해결해 주심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입니다. 예수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죄의 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며, 영생의 생명은 부활의 생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을 이기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0:25-26).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그 분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같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 10:27) 라고 고백이 복이 되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입술은 복이 있는 자이며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인생의 미래에 대한 해답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 14:1-2).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경제와 정치, 건강에 관하여 아무도 장담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스스로 인생의 죽음 너머의 영원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생의 미래와 영원에 대한 완전한 보증이 되셔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며, 그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토록 있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오시기 위하여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1-14). 주님께서는 충신이시며 진실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분이 백마를 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천국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2). 성령께서 사도 요한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뜨거운 지옥불이 아니라,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일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 용서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특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고,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왕중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보장과 확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천사의 찬양과 같이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기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경배하며 그 분의 이름을 더욱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