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연구 (7) 베풀 힘이 있거든 아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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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6-03-18 17:31본문
잠언 연구 (7) 베풀 힘이 있거든 아끼지 말라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잠 2:27-28)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잠언 3장 27절부터 35절까지입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예배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드러나고, 직장에서 드러나고,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돈을 쓰는 방식에서 드러나고, 말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아주 큰 사건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특별한 기도응답, 놀라운 은혜의 체험, 거대한 사역의 열매, 눈에 띄는 헌신, 이런 것들 속에서만 믿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로 데려갑니다. 내가 이웃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미루는가 미루지 않는가,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악한 계획이 있는가 없는가, 내가 이유 없이 다투는 사람인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인가, 내가 포학한 사람의 성공을 부러워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길을 붙드는가. 성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신앙의 진실성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러면 네 곁에 있는 이웃에게는 어떠한가? 네 손에 선을 행할 능력이 있을 때 너는 어떻게 하는가? 네 마음속에는 무엇을 품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주님의 지혜를 다시 붙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선을 미루지 않습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본문 27절과 2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을 베풀 힘이 있는데도 선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고, 네게 있거든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로 살아갑니다.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을 때가 미국 유학 시절 때입니다.
처음 미국에 도착 할 때는 캐리어 가방 3-4 개가 전부였습니다. 렌트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가구점에 가서 살 생각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이 소파를 가져다 주고, 교수님이 가구들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교회에 사는 한인이 먹을 양식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패스코에 사시던 집사님이 장학금을 매달 지원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IMF 가 일어났을 때에 제가 일하던 직장에서 한 분이 수표 200 불을 주시며 격려해 주시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돈은 그 분들에게도 소중한 금액이었지만,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을 위해 기꺼히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아시고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가 직접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이 묻습니다. “너는 할 수 있는 선을 했느냐? 너는 지금 해야 할 선을 미루지 않았느냐?”라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죄는 악한 행동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하지 않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까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억지로 몰아붙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손에 힘이 있거든, 네 손에 그것이 있거든, 네가 오늘 할 수 있거든” 그 선을 미루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도르가의 선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도르가는 어려운 과부들을 위하여 옷을 지어 나누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선행을 보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살리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우리의 믿음은 거대한 구호보다 작은 선행에서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지체 중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을 베푸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병든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 격려해 줄수도 있고, 식사를 대접하며 응원의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성도를 위하여는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하지.” “조금 여유 생기면 하지.”
바로 그때 오늘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네게 있거든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선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에도 때가 있습니다. 격려에도 때가 있습니다. 도움에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오늘이 지나가면,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선을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선을 결심만 하지 않습니다. 선을 미루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오늘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물질의 능력만이 아닙니다. 미소를 줄 능력, 따뜻한 말을 줄 능력, 함께 울어 줄 능력, 기도해 줄 능력, 찾아가 줄 능력, 용서할 능력, 손 내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줄 것이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손에 돈이 없을 수는 있어도, 내 입술에 위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내 마음까지 메말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선을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맹인이 부르짖을 때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문둥병자가 손 내밀 때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굶주린 무리를 보실 때 “내일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조금 더 나아진 다음에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도 미루어진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뒤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미루지 않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미루지 않는 사랑의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각자가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미루고 있는 선은 무엇입니까?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할 수 있는 선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 손에 있거든, 오늘 실천해야 합니다.
2. 지혜로운 사람은 이웃을 향해 악을 꾸미지 않습니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잠 3:28).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라.”
이 말씀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전에, 마음속의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해하려고 꾀하지 말라.” 이 말은 단순히 실제로 해를 끼치지 말라는 정도를 넘어서, 이웃을 해할 의도를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행동만 보지 않고 마음을 봅니다. 겉으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릴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악을 행했습니다. 그가 행한 악으로 나봇이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에게도 재앙을 내리셔서 심판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그 이웃은 당신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를 이용해서 악을 계획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을 믿고 찾아온 요셉의 신뢰를 배신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우물에 가둔 후에 나중에 미디안의 손에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같은 피를 나눈 형제에게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러시아가 평안히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것은 이웃을 향해 악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죽거나 다치고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대개 먼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가 훨씬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약점과 내면의 고통, 그리고 상처와 기대를 기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히 “네 곁에 평안히 사는 이웃”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 안에서 나를 신뢰하는 배우자를 향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거친 언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는 부양 가족입니다. 그러한 관계 때문에 자녀에게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녀가 부모를 향하여 함부로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믿고 함께 세워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높거나,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해서,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누군가를 조종할 권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맡겨진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신뢰받는 위치일수록 더 정직해야 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깨끗해야 합니다.
지난 달에 포도원 교회의 김문훈 목사님이 사역자들에게 거친 언행과 욕설을 수시로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로 그 분은 교회에서 사임해야 했고 교회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역자들이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살인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다루셨습니다. 간음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음욕의 시선을 다루셨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행동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오래 품고 있던 것이 결국 말이 되고, 태도가 되고, 행동이 되고, 관계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을 조심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내가 무슨 나쁜 행동을 했나?”만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실패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상처를 돌려주고 싶어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곁에서 평안히 사는 사람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향력은 해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살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이유 없이 다투지 않습니다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잠 3:30).
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여기서 핵심은 “까닭 없이”, “이유 없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진리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말까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자기 감정 때문에, 자기 우월감 때문에, 자기 기분 때문에 싸움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싸울 이유를 찾습니다. 조금만 말이 달라도 부딪칩니다. 조금만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따집니다.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공격합니다. 조금만 내 뜻대로 안 되면 표정을 바꿉니다.
사울이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후에는 다윗을 미워했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사울의 자아와 감정이 다윗에게 악을 행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다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인터넷의 댓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욕을 주곤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으로 누군가에 대한 비방과 조롱을 한다면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사대 속에서 성도의 말과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긴장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는 평안이 생깁니까, 불편함이 쌓입니까? 내 말은 관계를 이어 줍니까, 잘라 냅니까?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말합니까, 이기려고 말합니까? 나는 진실을 드러내려 합니까, 상대를 굴복시키려 합니까?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더불어 다투지 말라.”
잠언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시시 비비 가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나 오해 때문에 다투는 것은 진실 보다 판단이 먼저 앞서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불편함이 싸워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실수를 악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서운함이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이유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억울함을 당하셨지만 모든 모욕에 똑같이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셨고, 말씀해야 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가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주님은 고통과 상처를 분노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며 도리어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모든 상처와 아픔이 인간의 죄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여기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누르려 하고, 말로 이기려 하고, 끝까지 자기 옳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화평을 선택해야 합니다. 화평은 비겁함이 아닙니다. 화평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직접 심판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매번 이겨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4. 지혜로운 사람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1-32)
31절과 32절은 오늘 본문의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와는 더불어 사귀시느니라.”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앞에서는 선행과 관계에 대한 말씀을 하다가 갑자기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미루고, 이웃을 향해 악을 품고, 이유 없이 다투는 데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 중 하나가 바로 부러움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포학한 사람이 때로는 빨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보다 더 빨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종종 강한 자를 칭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포학한 행동을 하지 말라”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먼저 부러워한 다음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높이는 대상을 결국 따라가게 됩니다. 부러움은 imitation, 모방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반면 정직한 자와는 더불어 사귀신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잠 3:33-35).
여호와의 저주는 악인의 집에 있고,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으며,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지만 미련한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마지막에 평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결코 흐릿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집에는 저주가 있고,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거만한 자와 겸손한 자의 끝이 다르고,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마지막이 다르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숨은 선행도 보고 계시고, 우리의 감춰진 악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보시고, 우리의 교만도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판단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할 수 있는 선을 미루지 말고, 이웃을 해치지 말며, 이유 없이 다투지 말고, 세상의 강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며, 오늘 행할 수 있는 선을 지금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미루지 말고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잠 2:27-28)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잠언 3장 27절부터 35절까지입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예배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드러나고, 직장에서 드러나고,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돈을 쓰는 방식에서 드러나고, 말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아주 큰 사건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특별한 기도응답, 놀라운 은혜의 체험, 거대한 사역의 열매, 눈에 띄는 헌신, 이런 것들 속에서만 믿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로 데려갑니다. 내가 이웃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미루는가 미루지 않는가,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악한 계획이 있는가 없는가, 내가 이유 없이 다투는 사람인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인가, 내가 포학한 사람의 성공을 부러워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길을 붙드는가. 성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신앙의 진실성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러면 네 곁에 있는 이웃에게는 어떠한가? 네 손에 선을 행할 능력이 있을 때 너는 어떻게 하는가? 네 마음속에는 무엇을 품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주님의 지혜를 다시 붙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선을 미루지 않습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본문 27절과 2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을 베풀 힘이 있는데도 선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고, 네게 있거든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로 살아갑니다.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을 때가 미국 유학 시절 때입니다.
처음 미국에 도착 할 때는 캐리어 가방 3-4 개가 전부였습니다. 렌트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가구점에 가서 살 생각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이 소파를 가져다 주고, 교수님이 가구들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교회에 사는 한인이 먹을 양식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패스코에 사시던 집사님이 장학금을 매달 지원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IMF 가 일어났을 때에 제가 일하던 직장에서 한 분이 수표 200 불을 주시며 격려해 주시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돈은 그 분들에게도 소중한 금액이었지만,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을 위해 기꺼히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아시고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가 직접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이 묻습니다. “너는 할 수 있는 선을 했느냐? 너는 지금 해야 할 선을 미루지 않았느냐?”라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죄는 악한 행동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하지 않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까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억지로 몰아붙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손에 힘이 있거든, 네 손에 그것이 있거든, 네가 오늘 할 수 있거든” 그 선을 미루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도르가의 선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도르가는 어려운 과부들을 위하여 옷을 지어 나누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선행을 보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살리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우리의 믿음은 거대한 구호보다 작은 선행에서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지체 중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을 베푸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병든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 격려해 줄수도 있고, 식사를 대접하며 응원의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성도를 위하여는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하지.” “조금 여유 생기면 하지.”
바로 그때 오늘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네게 있거든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선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에도 때가 있습니다. 격려에도 때가 있습니다. 도움에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오늘이 지나가면,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선을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선을 결심만 하지 않습니다. 선을 미루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오늘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물질의 능력만이 아닙니다. 미소를 줄 능력, 따뜻한 말을 줄 능력, 함께 울어 줄 능력, 기도해 줄 능력, 찾아가 줄 능력, 용서할 능력, 손 내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줄 것이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손에 돈이 없을 수는 있어도, 내 입술에 위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내 마음까지 메말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선을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맹인이 부르짖을 때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문둥병자가 손 내밀 때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굶주린 무리를 보실 때 “내일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조금 더 나아진 다음에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도 미루어진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뒤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미루지 않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미루지 않는 사랑의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각자가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미루고 있는 선은 무엇입니까?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할 수 있는 선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 손에 있거든, 오늘 실천해야 합니다.
2. 지혜로운 사람은 이웃을 향해 악을 꾸미지 않습니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잠 3:28).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라.”
이 말씀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전에, 마음속의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해하려고 꾀하지 말라.” 이 말은 단순히 실제로 해를 끼치지 말라는 정도를 넘어서, 이웃을 해할 의도를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행동만 보지 않고 마음을 봅니다. 겉으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릴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악을 행했습니다. 그가 행한 악으로 나봇이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에게도 재앙을 내리셔서 심판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그 이웃은 당신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를 이용해서 악을 계획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을 믿고 찾아온 요셉의 신뢰를 배신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우물에 가둔 후에 나중에 미디안의 손에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같은 피를 나눈 형제에게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러시아가 평안히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것은 이웃을 향해 악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죽거나 다치고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대개 먼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가 훨씬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약점과 내면의 고통, 그리고 상처와 기대를 기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히 “네 곁에 평안히 사는 이웃”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 안에서 나를 신뢰하는 배우자를 향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거친 언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는 부양 가족입니다. 그러한 관계 때문에 자녀에게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녀가 부모를 향하여 함부로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믿고 함께 세워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높거나,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해서,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누군가를 조종할 권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맡겨진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신뢰받는 위치일수록 더 정직해야 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깨끗해야 합니다.
지난 달에 포도원 교회의 김문훈 목사님이 사역자들에게 거친 언행과 욕설을 수시로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로 그 분은 교회에서 사임해야 했고 교회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역자들이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살인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다루셨습니다. 간음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음욕의 시선을 다루셨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행동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오래 품고 있던 것이 결국 말이 되고, 태도가 되고, 행동이 되고, 관계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을 조심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내가 무슨 나쁜 행동을 했나?”만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실패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상처를 돌려주고 싶어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곁에서 평안히 사는 사람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향력은 해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살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이유 없이 다투지 않습니다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잠 3:30).
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여기서 핵심은 “까닭 없이”, “이유 없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진리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말까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자기 감정 때문에, 자기 우월감 때문에, 자기 기분 때문에 싸움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싸울 이유를 찾습니다. 조금만 말이 달라도 부딪칩니다. 조금만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따집니다.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공격합니다. 조금만 내 뜻대로 안 되면 표정을 바꿉니다.
사울이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후에는 다윗을 미워했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사울의 자아와 감정이 다윗에게 악을 행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다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인터넷의 댓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욕을 주곤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으로 누군가에 대한 비방과 조롱을 한다면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사대 속에서 성도의 말과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긴장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는 평안이 생깁니까, 불편함이 쌓입니까? 내 말은 관계를 이어 줍니까, 잘라 냅니까?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말합니까, 이기려고 말합니까? 나는 진실을 드러내려 합니까, 상대를 굴복시키려 합니까?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더불어 다투지 말라.”
잠언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시시 비비 가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나 오해 때문에 다투는 것은 진실 보다 판단이 먼저 앞서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불편함이 싸워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실수를 악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서운함이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이유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억울함을 당하셨지만 모든 모욕에 똑같이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셨고, 말씀해야 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가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주님은 고통과 상처를 분노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며 도리어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모든 상처와 아픔이 인간의 죄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여기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누르려 하고, 말로 이기려 하고, 끝까지 자기 옳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화평을 선택해야 합니다. 화평은 비겁함이 아닙니다. 화평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직접 심판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매번 이겨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4. 지혜로운 사람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1-32)
31절과 32절은 오늘 본문의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와는 더불어 사귀시느니라.”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앞에서는 선행과 관계에 대한 말씀을 하다가 갑자기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미루고, 이웃을 향해 악을 품고, 이유 없이 다투는 데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 중 하나가 바로 부러움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포학한 사람이 때로는 빨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보다 더 빨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종종 강한 자를 칭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포학한 행동을 하지 말라”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먼저 부러워한 다음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높이는 대상을 결국 따라가게 됩니다. 부러움은 imitation, 모방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반면 정직한 자와는 더불어 사귀신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잠 3:33-35).
여호와의 저주는 악인의 집에 있고,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으며,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지만 미련한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마지막에 평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결코 흐릿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집에는 저주가 있고,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거만한 자와 겸손한 자의 끝이 다르고,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마지막이 다르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숨은 선행도 보고 계시고, 우리의 감춰진 악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보시고, 우리의 교만도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판단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할 수 있는 선을 미루지 말고, 이웃을 해치지 말며, 이유 없이 다투지 말고, 세상의 강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며, 오늘 행할 수 있는 선을 지금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미루지 말고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