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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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6-02-25 16:26본문
관계의 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 즉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며 우리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이 바로 율법이며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가르치는 교훈의 핵심이 바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계는 불행과 원망과 고통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맺는 것 같지만,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과 지속적이며 의미가 있고 신뢰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가장 관계가 좋지 않던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관계는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영국의 유명한 군인이며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 수상에 관한 일화입니다. 처칠이 어렸을 때 런던에 있는 템스 강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깊은 물에 빠진적이 있었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라고 소리를 쳤지만 구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청년이 지나가다가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안 처칠의 할아버지가 청년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당신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라고 하자 청년은 '선생님, 저는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를 대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사람인데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연구실에서 실험하여 여러 가지 약을 발명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는 페니실린 주사약입니다. 플레밍은 이 약을 성공시킴으로 노벨 의학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세계 2차 대전 때 처칠 장군이 아프리카 전쟁에서 큰 병에 걸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플레밍 박사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페니실린으로 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처칠과 플레밍은 서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은혜를 갚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부족함 때문에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항상 베푸는 위치에서만 살 수 있거나 받는 사람이 항상 받는 자리에서만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서 그 관계는 항상 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 생각지 않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는 당신은, 훗날 그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바로 그 사람이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I. 왜 우리는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나요?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황금률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죄로 인한 본성의 타락입니다. 타락의 근본뿌리는 자아중심에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교만이 찾아오며 하나님을 떠나 부패한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고 죽인 것의 본질은 자아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면서, 결국은 경쟁자인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자아 중심의 삶에서는 오직 자신이 신이 되어 섬김을 받으려 하고, 높임을 받으려는 욕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질투심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황금율을 삶에 적용함으로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부패한 심성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닮게 하시며, 우리의 자아중심적인 삶을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II. 우리가 황금율로 살아가는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율법이며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의 핵심이 바로 다른 사람을 자신이 받고 싶은대로 대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레위기 19장에서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9-10).
하나님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이 그것을 주워서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부요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며 돕도록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식량을 구해야 하는데, 식량을 살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돈이 없기에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고, 포도원의 열매를 딴다면 허기진 배를 채우며 하루 하루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도록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룻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에서 돌아왔을 때에 식량일 떨어지자, 보아스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운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이 말씀은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꼭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억압을 받게나 돈을 강탈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면 마음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불이익을 받게 되면 큰 어려움이 찾아오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고통이 있음을 생각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황금율을 적용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1).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비판을 하는 것 자체도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참으로 감정이 상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비판을 받고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비판이 왜곡될 수도 있고, 정당한 거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는 입장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더욱이 비판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거라면 무척이나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공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 비판이 과장된 거라면, 물론 대부분의 비판이 과장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 비판이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비판을 받는 입장은 억울하고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비판하지 않고 권면의 말씀으로 세우고자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권면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듣는 자는 진실된 자의 충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함께 하십니다. 특히 가족이나 교회의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비판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하고 힘들어도 참고 인내하며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상대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라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인관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존중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을 소중하게 대할 때에 우리는 그들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우리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드리는 헌금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체들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준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고 예배와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며, 영혼들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주의 일에 무관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서는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로움의 기준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고아를 돌보는 것이며 환난 중에 있는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도 의로움의 중요한 기준이며, 경건의 모습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을 무척이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과 돌봄의 섬김을 실천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이 자신의 입술로 통하여 자신이 사람들을 볼보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를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꺽고 그 잇 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욥 29:11-17).
욥은 빈민과 고아를 도왔으며,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가난한 자의 바이가 되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욥은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무척이나 존중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에 사람들은 욥을 존경했습니다.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 천장에 붙었었느니라.” (욥 29:8-10).
사람들이 욥을 경건한 모습과 의로운 행실로 인하여 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을 보고 소년들은 그 위엄에 놀라 숨는 것이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예를 갖추고 방백들은 자신의 입을 막고 말을 참는 것이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는 것은 욥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어떠한 말에도 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사람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의 사람들이 욥의 위엄을 높이며 그를 무척이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중하는 모습을 통하여 의로운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 15:22).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신뢰입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신뢰를 받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칭찬할 만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신뢰가 없이는 건강한 대인 관계랄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뢰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일을 합니다. 특히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는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함께 일을 해 갑니다. 이때 서로를 향한신뢰를 주고 받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가치입니다. 함께 섬기는 지체들을 믿어 주고 함께 하는 것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주는 것은 서로에게 사랑을 주며 행복을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있기에 신뢰를 깨트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큰 대가지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당하셨고,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이와같이 서로를 향한 기대감을 저버리기에 신뢰가 무너지고 마음의 상처를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끊임없는 신뢰를 부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뢰를 주는 만큼 사람들은 그 기대를 가지고 일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믿어주면 우리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들간의 불신이 커져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신뢰를 하지 않는 분열의 모습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다시 한번 믿어주고 신뢰를 보내줌으로 우리는 서로를 세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하시고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실패하지만, 하나님이 지속적인 신뢰를 가지고 응원하시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도전하며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상대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이 쌓이게 되면 자신의 인격은 깊어지고 존중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 즉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며 우리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이 바로 율법이며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가르치는 교훈의 핵심이 바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계는 불행과 원망과 고통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맺는 것 같지만,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과 지속적이며 의미가 있고 신뢰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가장 관계가 좋지 않던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관계는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영국의 유명한 군인이며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 수상에 관한 일화입니다. 처칠이 어렸을 때 런던에 있는 템스 강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깊은 물에 빠진적이 있었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라고 소리를 쳤지만 구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청년이 지나가다가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안 처칠의 할아버지가 청년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당신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라고 하자 청년은 '선생님, 저는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를 대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사람인데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연구실에서 실험하여 여러 가지 약을 발명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는 페니실린 주사약입니다. 플레밍은 이 약을 성공시킴으로 노벨 의학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세계 2차 대전 때 처칠 장군이 아프리카 전쟁에서 큰 병에 걸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플레밍 박사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페니실린으로 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처칠과 플레밍은 서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은혜를 갚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부족함 때문에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항상 베푸는 위치에서만 살 수 있거나 받는 사람이 항상 받는 자리에서만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서 그 관계는 항상 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 생각지 않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는 당신은, 훗날 그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바로 그 사람이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I. 왜 우리는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나요?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황금률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죄로 인한 본성의 타락입니다. 타락의 근본뿌리는 자아중심에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교만이 찾아오며 하나님을 떠나 부패한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고 죽인 것의 본질은 자아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면서, 결국은 경쟁자인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자아 중심의 삶에서는 오직 자신이 신이 되어 섬김을 받으려 하고, 높임을 받으려는 욕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질투심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황금율을 삶에 적용함으로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부패한 심성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닮게 하시며, 우리의 자아중심적인 삶을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II. 우리가 황금율로 살아가는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율법이며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의 핵심이 바로 다른 사람을 자신이 받고 싶은대로 대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레위기 19장에서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9-10).
하나님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이 그것을 주워서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부요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며 돕도록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식량을 구해야 하는데, 식량을 살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돈이 없기에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고, 포도원의 열매를 딴다면 허기진 배를 채우며 하루 하루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도록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룻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에서 돌아왔을 때에 식량일 떨어지자, 보아스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운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이 말씀은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꼭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억압을 받게나 돈을 강탈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면 마음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불이익을 받게 되면 큰 어려움이 찾아오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고통이 있음을 생각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황금율을 적용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1).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비판을 하는 것 자체도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참으로 감정이 상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비판을 받고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비판이 왜곡될 수도 있고, 정당한 거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는 입장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더욱이 비판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거라면 무척이나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공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 비판이 과장된 거라면, 물론 대부분의 비판이 과장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 비판이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비판을 받는 입장은 억울하고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비판하지 않고 권면의 말씀으로 세우고자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권면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듣는 자는 진실된 자의 충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함께 하십니다. 특히 가족이나 교회의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비판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하고 힘들어도 참고 인내하며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상대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라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인관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존중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을 소중하게 대할 때에 우리는 그들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우리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드리는 헌금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체들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준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고 예배와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며, 영혼들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주의 일에 무관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서는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로움의 기준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고아를 돌보는 것이며 환난 중에 있는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도 의로움의 중요한 기준이며, 경건의 모습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을 무척이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과 돌봄의 섬김을 실천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이 자신의 입술로 통하여 자신이 사람들을 볼보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를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꺽고 그 잇 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욥 29:11-17).
욥은 빈민과 고아를 도왔으며,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가난한 자의 바이가 되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욥은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무척이나 존중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에 사람들은 욥을 존경했습니다.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 천장에 붙었었느니라.” (욥 29:8-10).
사람들이 욥을 경건한 모습과 의로운 행실로 인하여 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을 보고 소년들은 그 위엄에 놀라 숨는 것이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예를 갖추고 방백들은 자신의 입을 막고 말을 참는 것이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는 것은 욥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어떠한 말에도 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사람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의 사람들이 욥의 위엄을 높이며 그를 무척이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중하는 모습을 통하여 의로운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 15:22).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신뢰입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신뢰를 받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칭찬할 만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신뢰가 없이는 건강한 대인 관계랄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뢰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일을 합니다. 특히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는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함께 일을 해 갑니다. 이때 서로를 향한신뢰를 주고 받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가치입니다. 함께 섬기는 지체들을 믿어 주고 함께 하는 것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주는 것은 서로에게 사랑을 주며 행복을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있기에 신뢰를 깨트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큰 대가지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당하셨고,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이와같이 서로를 향한 기대감을 저버리기에 신뢰가 무너지고 마음의 상처를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끊임없는 신뢰를 부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뢰를 주는 만큼 사람들은 그 기대를 가지고 일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믿어주면 우리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들간의 불신이 커져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신뢰를 하지 않는 분열의 모습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다시 한번 믿어주고 신뢰를 보내줌으로 우리는 서로를 세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하시고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실패하지만, 하나님이 지속적인 신뢰를 가지고 응원하시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도전하며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상대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이 쌓이게 되면 자신의 인격은 깊어지고 존중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