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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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1,514회 작성일 22-09-21 18:02본문
질그릇의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 7-10)
저는 오늘 ‘질그릇의 보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소중한 보배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보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진흙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인생이 소중하고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찾아오며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하는 장애를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동반자이십니다. 그 분은 동반자일 뿐 아니라, 생명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진흙과 같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보배이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 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은 영어로는 시련을 만나다(troubled)입니다. 헬라어로는 눌림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사방으로 눌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싸이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가 크게 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누리고 시련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우리가 싸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4절로 17절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아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도단성에 와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대군대를 동원해서 밤새껏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밖에 나가보고 기겁을 하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첩첩히 포위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열하 6: 15). 그때 엘리사가 종을 보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리라 하고.” (열하 6: 16). 그리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하 6: 17). 하나님의 종이 눈을 들어 보니까 아람군대와 엘리야 사이에 하늘에 불말과 불병거가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아람군대는 엘리사를 포로로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우리 주위에 아람군대와 같이 첩첩이 둘러 싸일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둘러싸고, 세상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혹은 질병이 우리를 둘러사고, 생활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우리를 둘러싸는가 하면 원수가 둘러싸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그때 우리 힘으로 싸우려고 하다가는 우리 질그릇은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는 문제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 밖의 다른 것을 의지하면 우리는 반드시 깨어집니다. 질그릇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 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안에 계시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요한1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여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이는 세상보다 크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배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의미는 무척이나 당황한다는(perplexed) 의미입니다. 갑작스러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한 말을 잃어버리고 당황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요셉이 갑자기 노예로 팔려가는 환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충성스러운 마음을 인정받아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극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를 감옥에서 내보내시고,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환란중에 피할 바위며 산성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도 시편의 말씀을 믿음으로 외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 1) 하나님의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시기에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겠습니까? 우리는 진흙과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요 구원이시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요셉이나 욥과 같은 답답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갈등은 큰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두 번째 가면서,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로 인하여 고통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로는 형제간의 갈등으로, 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함으로 오는 생활고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답한 일을 당하고 낙심될 때 우리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고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게 되면 우리가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주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아래서 안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주님께서 짐을 지어주심을 감사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55 편 22 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맡겨야 주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맡기지 아니하면 주님이 책임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맡길 때 용기와 평안과 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들어와서 어두움이 떠나갈 때까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맡기면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싸워 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은 마귀의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19 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천한 것이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듯지 악한 자의 권세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 8)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마귀의 권세를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핍박을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보배되신 주님을 위한 것이기에, 그 핍박은 영광스러운 핍박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핍박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보배로운 삶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로 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라고 합니다. 핍박이 클수록 하늘나라에 상이 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실 때, 우리는 어떠한 핍박도 이길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넘치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초대교회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 이후에 부활하셨듯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망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으로 영원이 주님과 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말하기를 “보라 하늘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는 것을 보는도다.” 유대인들이 돌을 비오듯이 던져서 스데반을 죽였지만 스데반은 돌무더기에 들어가면서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이렇게 하니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데반은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사울이 충격을 받았고, 그 후에 주님을 믿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축복으로 사울이 주님을 영접하여 큰 역사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모든 것은 소중한 가치로 이 땅에 남게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면 열 두제자의 순교일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브루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고 다시 유대에 돌아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롯 유다 대신 12제자의 반열에 오른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 순교 안당한 사람은 사도요한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서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아무리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 속에 있는 부활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넘치게 붙잡아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으로 계심을 확신하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 7-10)
저는 오늘 ‘질그릇의 보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소중한 보배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보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진흙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인생이 소중하고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찾아오며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하는 장애를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동반자이십니다. 그 분은 동반자일 뿐 아니라, 생명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진흙과 같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보배이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 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은 영어로는 시련을 만나다(troubled)입니다. 헬라어로는 눌림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사방으로 눌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싸이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가 크게 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누리고 시련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우리가 싸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4절로 17절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아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도단성에 와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대군대를 동원해서 밤새껏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밖에 나가보고 기겁을 하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첩첩히 포위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열하 6: 15). 그때 엘리사가 종을 보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리라 하고.” (열하 6: 16). 그리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하 6: 17). 하나님의 종이 눈을 들어 보니까 아람군대와 엘리야 사이에 하늘에 불말과 불병거가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아람군대는 엘리사를 포로로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우리 주위에 아람군대와 같이 첩첩이 둘러 싸일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둘러싸고, 세상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혹은 질병이 우리를 둘러사고, 생활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우리를 둘러싸는가 하면 원수가 둘러싸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그때 우리 힘으로 싸우려고 하다가는 우리 질그릇은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는 문제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 밖의 다른 것을 의지하면 우리는 반드시 깨어집니다. 질그릇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 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안에 계시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요한1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여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이는 세상보다 크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배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의미는 무척이나 당황한다는(perplexed) 의미입니다. 갑작스러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한 말을 잃어버리고 당황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요셉이 갑자기 노예로 팔려가는 환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충성스러운 마음을 인정받아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극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를 감옥에서 내보내시고,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환란중에 피할 바위며 산성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도 시편의 말씀을 믿음으로 외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 1) 하나님의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시기에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겠습니까? 우리는 진흙과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요 구원이시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요셉이나 욥과 같은 답답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갈등은 큰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두 번째 가면서,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로 인하여 고통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로는 형제간의 갈등으로, 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함으로 오는 생활고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답한 일을 당하고 낙심될 때 우리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고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게 되면 우리가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주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아래서 안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주님께서 짐을 지어주심을 감사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55 편 22 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맡겨야 주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맡기지 아니하면 주님이 책임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맡길 때 용기와 평안과 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들어와서 어두움이 떠나갈 때까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맡기면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싸워 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은 마귀의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19 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천한 것이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듯지 악한 자의 권세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 8)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마귀의 권세를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핍박을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보배되신 주님을 위한 것이기에, 그 핍박은 영광스러운 핍박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핍박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보배로운 삶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로 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라고 합니다. 핍박이 클수록 하늘나라에 상이 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실 때, 우리는 어떠한 핍박도 이길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넘치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초대교회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 이후에 부활하셨듯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망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으로 영원이 주님과 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말하기를 “보라 하늘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는 것을 보는도다.” 유대인들이 돌을 비오듯이 던져서 스데반을 죽였지만 스데반은 돌무더기에 들어가면서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이렇게 하니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데반은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사울이 충격을 받았고, 그 후에 주님을 믿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축복으로 사울이 주님을 영접하여 큰 역사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모든 것은 소중한 가치로 이 땅에 남게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면 열 두제자의 순교일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브루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고 다시 유대에 돌아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롯 유다 대신 12제자의 반열에 오른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 순교 안당한 사람은 사도요한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서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아무리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 속에 있는 부활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넘치게 붙잡아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으로 계심을 확신하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