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4) - 사도 바울의 베뢰아와 아덴 사역 (행 17: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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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582회 작성일 19-01-31 15:23본문
사도행전 강해 (24) - 사도 바울의 베뢰아와 아덴 사역 (행 17:10-34)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2).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사역 후에 베뢰아로 이동하게 됩니다. 베뢰아로 급히 간 이유는 유대인들의 핍박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짧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이 되는 교회로 잘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뢰아에 이른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뢰아의 사역과 아덴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1.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무시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의미는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게 됨으로 그들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세하게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 사역하는 사도 바울을 훼방함으로 다시 바울은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에게서 배우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파고들어 연구하며 배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로 믿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세도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믿음을 뛰어넘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및 민수기와 신명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속의 역사를 배울 수 있으며,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의 죄악성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라는 모압 여인과 보아스를 통하여 영적인 어두움에서도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려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상하를 통하여 사울과 다윗을 대비시키시며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으로 왕에 오른 솔로몬이 큰 지혜와 부귀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스라엘의 분열과 타락의 씨앗을 놓는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열왕기 상하와 역대상하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왕과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타락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배우면서 그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바탕위에 믿음이 자라가야 합니다.
내년 사역에는 제자 훈련에 ‘성경 숲보기’ 와 같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과정을 넣고자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배우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아덴 사람은 우상과 철학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베뢰아에 두고온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성을 돌아보다가 온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이나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고, 저자라고 번역된 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아고라는 광장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의미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장과 같은 기능을 하다가 점차 정치적인 토론이나 경제와 철학을 토론하는 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토론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대화하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아덴은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이곳에는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플라톤이나 아르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고, 그 결과로 철학과 건축과 예술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리스어인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신약 성경도 헬라어로 씌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가 있었고 그리스 철학으로 인하여 우상이 발달하였고 아덴의 거리 곳곳에는 신전들과 우상의 조각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8).
헬라 사상의 큰 축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쾌락이 최고의 가치로 보았고, 고통을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자신을 절제함으로 오는 정신적인 평안을 의미했습니다. 즉, 정신적인 쾌락이 영원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많이 먹어 행복을 얻으면 그 후에 오는 고통이 크기에, 평소에 음식을 절제함으로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정원을 만들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서 그 안에서 보리빵과 물을 먹으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제놈에 의하여 창시된 철학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이성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성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너의 말하는 이 새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당시의 법정 재판소였습니다. 이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도시의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장소이며, 종교적인 면만 아니라 정치적인 회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사도 바울은 아덴을 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도 보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많은 신들 중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미처 숭배하지 못하는 신이 있기에 그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러한 모습에 동기를 얻어 설교합니다.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에 에피쿠로스 학파는 원자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믿었고, 스토아 학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첫째는 정령 신앙입니다. 이는 모든 생물 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식물이나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육체를 떠나면 그 영혼이 떠돌아다니며 인간 생활에 좋거나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 영혼들을 달래고 숭배하는 신앙입니다. 정령 숭배 사상은 나무를 숭배하거나 바위를 숭배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신론입니다. 이는 여러 신등을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헬라 신화에서 제우스나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등의 다양한 신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범신론입니다. 이는 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과 자연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실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헬라 사람들이 믿는 신화속의 신들과 같이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했습니다.
2.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5).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호흡을 계속해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호흡을 주시고 음식과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시편 104 편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살아가는 동물이나 식물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사람들의 필요를 자연을 통해서 채우시는 섭리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생명과 호흡과 필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6).
하나님은 사람을 한 형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땅에 거하도록 흩으셨고 우리가 살아가는 년수를 정하셨고, 거처하는 경계까지도 정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고통을 겪게 하는 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9).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입니다. 사람은 영이 있고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말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공업자가 만든 것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피조물인 돌이나 우상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0-31). 하나님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로 인하여 아레오바고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에덴 사람의 철학을 말씀에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2).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사역 후에 베뢰아로 이동하게 됩니다. 베뢰아로 급히 간 이유는 유대인들의 핍박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짧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이 되는 교회로 잘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뢰아에 이른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뢰아의 사역과 아덴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1.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무시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의미는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게 됨으로 그들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세하게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 사역하는 사도 바울을 훼방함으로 다시 바울은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에게서 배우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파고들어 연구하며 배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로 믿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세도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믿음을 뛰어넘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및 민수기와 신명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속의 역사를 배울 수 있으며,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의 죄악성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라는 모압 여인과 보아스를 통하여 영적인 어두움에서도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려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상하를 통하여 사울과 다윗을 대비시키시며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으로 왕에 오른 솔로몬이 큰 지혜와 부귀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스라엘의 분열과 타락의 씨앗을 놓는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열왕기 상하와 역대상하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왕과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타락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배우면서 그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바탕위에 믿음이 자라가야 합니다.
내년 사역에는 제자 훈련에 ‘성경 숲보기’ 와 같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과정을 넣고자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배우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아덴 사람은 우상과 철학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베뢰아에 두고온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성을 돌아보다가 온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이나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고, 저자라고 번역된 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아고라는 광장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의미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장과 같은 기능을 하다가 점차 정치적인 토론이나 경제와 철학을 토론하는 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토론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대화하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아덴은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이곳에는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플라톤이나 아르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고, 그 결과로 철학과 건축과 예술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리스어인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신약 성경도 헬라어로 씌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가 있었고 그리스 철학으로 인하여 우상이 발달하였고 아덴의 거리 곳곳에는 신전들과 우상의 조각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8).
헬라 사상의 큰 축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쾌락이 최고의 가치로 보았고, 고통을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자신을 절제함으로 오는 정신적인 평안을 의미했습니다. 즉, 정신적인 쾌락이 영원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많이 먹어 행복을 얻으면 그 후에 오는 고통이 크기에, 평소에 음식을 절제함으로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정원을 만들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서 그 안에서 보리빵과 물을 먹으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제놈에 의하여 창시된 철학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이성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성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너의 말하는 이 새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당시의 법정 재판소였습니다. 이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도시의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장소이며, 종교적인 면만 아니라 정치적인 회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사도 바울은 아덴을 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도 보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많은 신들 중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미처 숭배하지 못하는 신이 있기에 그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러한 모습에 동기를 얻어 설교합니다.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에 에피쿠로스 학파는 원자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믿었고, 스토아 학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첫째는 정령 신앙입니다. 이는 모든 생물 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식물이나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육체를 떠나면 그 영혼이 떠돌아다니며 인간 생활에 좋거나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 영혼들을 달래고 숭배하는 신앙입니다. 정령 숭배 사상은 나무를 숭배하거나 바위를 숭배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신론입니다. 이는 여러 신등을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헬라 신화에서 제우스나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등의 다양한 신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범신론입니다. 이는 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과 자연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실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헬라 사람들이 믿는 신화속의 신들과 같이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했습니다.
2.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5).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호흡을 계속해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호흡을 주시고 음식과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시편 104 편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살아가는 동물이나 식물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사람들의 필요를 자연을 통해서 채우시는 섭리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생명과 호흡과 필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6).
하나님은 사람을 한 형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땅에 거하도록 흩으셨고 우리가 살아가는 년수를 정하셨고, 거처하는 경계까지도 정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고통을 겪게 하는 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9).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입니다. 사람은 영이 있고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말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공업자가 만든 것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피조물인 돌이나 우상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0-31). 하나님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로 인하여 아레오바고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에덴 사람의 철학을 말씀에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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